‘김대중·오부치 선언’ 25년… 미래 한일 관계 발전의 세 가지 테마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2023. 5.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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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승의 海外事情]
복원된 韓日 셔틀 외교
더 큰 미래로 나아가려면
1998년 10월 8일 김대중 대통령(왼쪽)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일본 도쿄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마친 뒤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한일 셔틀 외교가 복원됐다.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 방일에 이어 지난 주말 기시다 총리가 방한하면서 12년간 닫혀 있던 정상 간 양자 방문의 물꼬가 터졌다. 이 작은 물꼬를 커다란 강물로 이어 나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한일 관계의 방향성, 즉 좌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풍랑이 와도 좌표가 정확하면 언젠가 뭍에 오른다. 그 좌표로서 윤 대통령이 제시한 것이 1998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일명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하 ‘김·오부치 선언’)이다.

‘김·오부치 선언’은 우리나라에서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대명사로 통한다.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해 일본이 명확한 사과를 외교 문서로 표명한 첫 사례라는 것이다. 사과가 물론 중요한 부분이지만, ‘김·오부치 선언’에는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세 가지 테마가 담겨 있다.

첫째는 ‘상호 인정’이다. ‘김·오부치 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한국이… 번영되고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한 데 대하여 경의를 표했다.” 동시에 김 대통령은 “전후 일본이…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수행해 온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피식민 경험이 있는 개도국 중에서 빈곤을 극복하고 민주화에 성공한 세계사 유일 사례라는 것은 우리 국민의 자긍심이다. 그러한 역사적 성과를 일본이 인정한 것이다. 일본 역시 이제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평화 애호국이고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국제사회의 리더라는 점을 인정받고 싶었다. 즉 한일 양국은 상대방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상호 교환한 것이다.

둘째 테마는 ‘상호 이익’이다. 외교에서 이익의 균형적 교환이 없다면 합의는 불가능하다. 당시 외환 위기를 맞이한 한국은 유동성 지원이 절실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방일을 계기로 일본에서 저금리 차관 30억달러를 확보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또한 대북 정책에 대한 지지가 필요했다. 냉전기의 대결적 남북 관계를 화해와 협력 관계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지지 표명” 네 글자로 화답했다.

일본도 바라는 것이 있었다.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는 일본에 충격이었다. 여기 대응하는 일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한국과 긴밀히 연대하고 협의하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중요 관심사였다. 우리 측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또 다른 중대 외교 목표는 국제연합에서 지도적 역할을 확보하는 것이다. 일본은 과거 국제연맹 초대 상임이사국 4국 중 하나였지만 만주사변 후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그 지위를 상실했다. 국제연맹의 후신인 국제연합에서 상임이사국 지위를 회복하는 것은 일본 외교의 숙원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상임이사국 진출 지지까지는 아니지만 “국제연합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의 기여와 역할을 평가하고 금후 일본의 그와 같은 기여와 역할이 증대되는 데 대한 기대를 표명”하여 일본 측 요청을 부분 수용했다.

셋째 테마는 ‘공동 대응’이다. 당시는 냉전이 끝나고 ‘반공’ 표어가 구심점을 상실하면서 한일 양국 모두 새로운 외교를 모색하던 시절이다. 한일 양국 모두 미국의 군사 동맹국이고, 대미 관계를 중시했으나, 친미 일변도로 끌려다니는 데는 거부감이 있었다.

‘김·오부치 선언’에서 “미국과의 안전보장 체제를 견지”하자면서도 “다자 간 대화 노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본 것이라든가,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 경제 체제의 유지·발전” “국경을 초월한 각종 범세계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협력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공통 고민을 반영한 것이다. 다자 외교 영역에서 세계 공통 과제에 공동 대응하면서, 한일 양국 모두 초강대국에 휘둘리지 않는 자율적 공간을 확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세 테마는 지금도 한일 양국에 울림을 갖는다. 우선 양국은 상대방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한국이 사실상 G8 반열에 올랐다는 점을 인정하고, 우리 역시 일본이 세계적 리더 중 하나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참에 우리의 G8 진출과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지지를 교환하면 어떨까?

양국은 또한 각자의 관심사를 존중해야 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반도체 분야 공조 강화, 전문가 시찰단 후쿠시마 현장 파견에 합의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조금씩이나마 서로 이익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제 한일 양국은 공동 대응을 구체화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한일 양국이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며 범세계적 과제에 공동 대응하는 “글로벌 어젠다 협력 파트너”라고 했다. 그러면 이제 한일 양국이 양자 관계를 넘어 아태 지역과 범세계적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공동 대응을 해나갈 것인지 실례를 보여줘야 한다.

한일 관계는 이제 일본이 ‘반성’하고 ‘사과’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다. 그러기엔 이제 양국 모두 덩치가 너무 크고 이해관계도 복잡하다. 이제 한일 관계에는 상호적 관점이 필요하다. 서로가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익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원칙 아래 국제사회에서 공동 대응 경험을 축적해 나간다면 우리는 결국 제2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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