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 울리면 가슴 쿵쾅쿵쾅, 신종 유행병을 아십니까
가수 아이유도 걸렸다
전화가 두려운 ‘콜 포비아’
“시간 될 때 전화 주세요.”
무심코 던진 이 한마디에 누군가는 ‘멘붕’에 빠진다. 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동공이 커지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간단한 용건이라도 인사말과 질문, 상대의 예상 대답까지 담은 한 편의 시나리오가 있어야 비로소 통화 버튼을 누른다. 친구·가족에게 전화하면서 ‘무슨 말을 하지’ ‘지금 걸어도 괜찮을까’라고 조바심을 내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이 신종 유행병(?)을 의심해봐야 한다. 이런 사람에게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를 건너뛰고 대뜸 전화부터 걸었다가는 “무례하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기 때문.
전화 통화를 두려워한 나머지 극도로 피하려는 증상을 가리켜 ‘전화 공포증’이라 부른다. ‘○○공포증’’△△포비아’라는 신조어가 쏟아지는 세상이라지만 전화 받는 일까지 공포를 느끼는 게 말이 되느냐는 조롱도 있다. 하지만 영어권에선 ‘콜 포비아(Call-phobia)’로 부를 정도로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됐다. 최근 가수 아이유는 자신이 전화 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방송에서 고백했다. 절친과 가장 오래 통화하는 시간이 길어야 3분이고, 엄마에게 전화가 와도 마음이 불편해진다고 했다. 전화 버튼 누르는 게 고역이다 보니 회사 업무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어려워져 정신과 상담을 받는 사람도 늘고 있다.
2023년은 처음으로 휴대폰 전화 통화가 이뤄진 지 50년이 되는 해. 1973년 4월 3일 미국 뉴욕에서 통신 업체 모토롤라의 연구원이 벽돌 휴대폰으로 통화 연결에 성공한 이후 반세기 동안 인류는 전화 기술을 극한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전화 문명을 거부하는 역현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 사람들은 왜 전화를 두려워하게 됐을까.
◇거울방 스파르타 전화 실습
전화 공포증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최근 ‘당당하게 전화하는 법’을 가르치는 스피치 학원이 늘고 있다. 지난 9일 저녁 서울 마포구에 있는 스피치 학원 ‘라이프스피치스쿨’. 상담사·마케팅 담당 회사원·사범대 학생 등 20~30대 수강생들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고 스피치 강사와 가상 전화 실습을 했다. 과제는 ‘자기 할 말만 쏟아내는 통신사 상담원 상대하기’. 상담사가 묻지도 않은 자사 서비스를 줄창 늘어놓을 때 대처법을 익히는 연습이었다. 첫 타자로 나선 남성 수강생. “어… 잘 들었습니다”라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지만 이내 우물쭈물. 강사가 “땡!”을 외쳤다. 옆 여성 수강생도 마찬가지였다. “설명 감사드려요. 제가 잘 못 들어서 다시 한번만....” 기운 없는 목소리에 역시 감점.
스피치 강사는 말했다. “(손으로 배꼽을 가리키며) 단전에서 끌어올린 소리로 단호하게, 하지만 정중하게 말해보세요. ‘A, B 기능에 대한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필요한 C 기능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이에요.” 내 생각을 전달하되 예의를 잃지 않는 게 포인트다. 통화 중에도 얼굴에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한다. 표정이 밝아야 생기 있는 음성으로 상대에게 의사를 분명히 전달할 수 있다. 교실에는 벽 전체에 거울을 붙여뒀다. 수강생이 통화 실습을 하면 강사와 다른 수강생들이 그가 표정 관리를 잘하는지 뚫어져라 쳐다봤다.
전화 공포증 치료를 포함한 스피치 학원의 수업은 회당 1시간30분 안팎, 8회 수업에 수강료는 60만~70만원이 든다. 중소기업 대표, 정치인, 전문 상담사, 취준생 등 남녀노소, 직업을 불문하고 콜 포비아 치료 수업을 듣는다고 한다. 수강생이 자신의 업무에 맞는 전화 대본을 써오면 강사가 시뮬레이션을 하며 첨삭해주는 방식.
이런 훈련이 효과가 있을까. 강민정 대표는 “단순히 전화 테크닉을 알려주는 것보다 전화 상대가 어떤 심리로 나와 통화하는지 이해하도록 근본적인 인간관계를 배우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며 “손 떨며 전화 받던 분들도 2~4개월이면 많이 좋아져서 졸업한다”고 말했다.
◇10초 통화에 10분 대본 만들기
전화 공포증의 주범으로 ‘스마트폰’이 지목된다. 카톡을 보내거나 SNS(소셜미디어)로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시대다 보니 구태여 전화를 택하지 않는 것. 하지만 아예 전화를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최근 온라인 게시판에는 이런 고충을 호소하는 MZ세대의 사연이 쏟아진다. 한 남성은 군 제대 후 자취방을 계약할 때 집주인에게 전화를 거는 일을 미루다 엄마에게 부탁했다. 앱으로 주문한 배달 음식이 잘못 왔지만 전화로 항의할 자신이 없어 그냥 먹었다는 사람도 있다. 10초면 끝낼 전화 용건을 위해 10분 동안 대본을 쓰고 있는 직장 후배 때문에 힘들다는 하소연까지. 한 방송사 기자는 “얼마 전 수습 교육을 마치기도 전에 퇴사한 후배에게 ‘뭐가 가장 힘들었느냐’고 물었더니 ‘취재원에게 전화하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전화는 즉각 답을 들을 수 있지만, 그 장점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있다. 통화를 언제 끊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애매하기 때문. 정확한 대화 내용이 남는 메신저와 달리 전화는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해야 할 때가 많다. 목소리로만 감정과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 점도 통화의 단점이다.
20년간 대학에서 말하기 수업을 진행한 이금희 아나운서는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한 젊은 세대일수록 전화에 공포를 느끼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며 “게임 아이템을 구입하면 레벨이 올라가는 것처럼 예측이 가능한 온라인 환경과 달리, 전화는 상담원과 통화처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더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벨소리에 심장부터 쿵쾅쿵쾅
전화 공포증은 전화가 걸려올 때 더 증폭된다. 예고 없이 걸려오는 데다 상대가 어떤 말을 꺼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모르는 번호일 경우엔 안 받는 게 차라리 속 편하다.
IT 기업에 다니는 강준일(37)씨는 코로나 기간 완전 재택근무를 하면서 스마트폰에 상사들 이름을 새로 저장했다. 바로 위 선임은 ‘좋은 분이야’, 팀장은 ‘편하게 받자’, 부장 및 임원은 ‘아빠라고 생각하자’라고 입력하는 식. 벨소리도 하프, 피리 연주처럼 차분하고 박자가 느린 음으로 설정했다. 강씨는 “상사 이름이 화면에 뜨면 말문이 막혀 조금이나마 편하게 받으려고 바꾼 건데 나중엔 그 음악 소리도 호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들렸다”고 했다.
전화 공포증은 TV 프로에서 코미디 소재로 풍자되기도 한다. 겉모습 멀쩡한 청년이 스피치 강사가 보는 앞에서 전화로 음식 배달 주문을 한다. 힘겹게 꿔바로우 주문에 성공하며 갈채를 받지만 곧바로 식당에서 걸려온 전화에 얼굴은 사색이 된다. 꿔바로우 재료가 소진됐다는 식당 사장의 설명을 듣고는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힘들면 사람 말고 ARS에 걸어보자
전문가들은 전화 공포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단계적 노출 요법’을 제안한다. 휴대폰을 평소 무음으로 해두거나 전화를 회피하는 중증 전화 공포증의 경우 사람이 아닌 컴퓨터 ARS 전화를 먼저 하는 게 낫다. 전화 행위에 대한 거부감부터 덜기 위해서다. 다음 단계는 식당 예약처럼 단순한 용건의 통화를 하면서 사람과 통화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나간다.
오대종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교수는 “직장 동료보다 가족, 지인처럼 내가 실수해도 무안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전화를 걸어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효과적”이라며 “처음에는 용건을 자세히 적은 메모를 보며 통화하고 불안감이 줄면 간단한 키워드로 메모 양을 줄여가고, 나중에는 메모를 안 보고 전화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황원준 한국정신건강연구소 대표는 “가까운 지인, 가족과도 전화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평소 대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를 늘리는 게 가장 근본적인 처방”이라고 말했다.
강민정 대표는 “전화가 어려운 점 중 하나는 바로 답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즉답이 어려울 경우 ‘실례지만 상사와 의논 후 다시 말해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시간을 벌자. 대화에 완충 역할을 하는 이런 ‘쿠션 언어’를 외워뒀다가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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