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제 니시하라가 아니다… 너희도 집에서 쓰는 성과 이름을 대라”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2023. 5.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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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되찾은 말과 이름
그리고 기이한 통성명
일러스트=한상엽

문학소년 야나모도 마사오(柳本正雄)는 1941년 진주만 공습이 있던 해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국어(國語)’ 시간에 일본말 가나를 배웠고, 도화(圖畫) 시간 첫 과제는 일장기 그리기였다.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진주만 공습 기념일)인 매월 8일은 학교에서 꽤 떨어진 언덕 위 신사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다녔다.

학교 정문을 지나면 독농가(篤農家) 니노미야(二宮尊德)의 동상이 있었다. 학생들은 등교 때마다 동상을 향해 고개 숙여 절을 하고 지나갔다. 정오에 사이렌이 울리면 어디에 있건 자리에서 일어나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몰장병을 위한 묵도를 했다. 운동장에서 열리는 전교생 조회 때는 제일 먼저 동쪽을 향해서 궁성요배(宮城遙拜)를 했다. 그리고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맹세)’를 일제히 큰소리로 외었다.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독농가 니노미야

징병, 징용 간 젊은이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학생들은 수시로 보리 베기, 모심기, 벼 베기, 보리밟기에 동원되었다. 여름철 등교할 때는 퇴비 증산을 위해 풀을 베어가야 했다.

1945년, 5학년이 되던 해에는 하루걸러 한 번씩 수업을 전폐하고 송근유(松根油)를 얻기 위해 솔뿌리를 캐러 다녔다. 턱없이 부족해진 수업 시수를 보충하느라 그해에는 여름방학이 없었다. 미국이 신형 폭탄으로 히로시마를 폭격한 후에는, 상급생들이 총동원되어 학교 측백나무 울타리 밖에 방공호를 팠다.

8월 16일 아침, 학교 운동장에서 평소보다 늦게 조회가 열렸다. 단상에 오른 아마기(天城) 교장은 “전쟁이 끝났고, 이제 방공호 파기 같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훈화했다. 그러곤 “나의 본래 성이 아마기가 아니라 조(趙)씨이니 이제부터는 조 교장 선생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조회가 끝난 후 교실에서는 ‘기이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담임인 니시하라(西原) 선생이 들어와 칠판에 커다랗게 ‘李種煥’이라고 한자로 판서를 하더니 ‘이종환’이라고 발음하고 나서 이것이 나의 이름이니 그리 알라고 했다. 그러고는 각자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성을 대라고 했다. 돌아가며 출석부 순서대로 자기의 성명을 밝혔다.”

그날 이후 야나모도 마사오는 유종호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훗날 문학평론가가 된 유종호는 “이렇게 기이한 통성명을 통한 이름 찾기가 해방 이후 우리가 치른 첫 의식이었다”고 기억했다.

일본의 패전 소식은 8월 15일 정오 일본, 그리고 조선을 비롯한 일본의 점령지 전역에서 방송된 일왕의 육성 방송, 소위 ‘옥음(玉音)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

당시 조선에 등록된 라디오는 약 33만 대(조선인 20만 대)에 불과했고, 한낮이어서 청취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4분 37초 동안 진행된 일왕의 육성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난해한 한문투 문장은 일본인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왕의 육성 방송 후 일본인 아나운서가 같은 내용을 다시 한 번 낭독했고, 이덕근 아나운서가 한국어로 번역한 원고를 또 한 번 읽었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반복해서 들어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815자의 ‘종전 조서’ 어느 곳에도 ‘패전’ ‘항복’ ‘해방’ ‘독립’ 같은 명시적 단어는 없었다. 그것이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해석’되는 것은 일왕이 수락하기로 한 ‘4국 공동선언’ 즉 포츠담선언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제13조)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알지 못했던 대부분의 청취자들은 일왕의 처연한 목소리와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으며…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등 몇몇 구절로 이제 전쟁이 끝났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었다.

휘문고보에 모인 군중

해방 당일은 다들 어리둥절해서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해방의 환희에 젖은 만세 인파가 본격적으로 거리에 쏟아져 나온 것은 이튿날 오전부터였다. 16일 오전 10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전국 형무소에서 ‘정치범’ 1000여 명이 석방되었다. 그에 앞서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패전 후 조선의 치안 유지를 제안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경제범 즉시 석방” “서울의 3개월분 식량 확보” 등 5가지 요구를 즉각 시행한다는 조건으로 그 제안을 수락했다. 16일 오후, 여운형의 집 근처 휘문고보 교정에는 기억을 더듬어 서툴게 그린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는 수천 군중이 모여들었다. 단상에 오른 여운형은 “조선 민족 해방의 날이 왔다”고 선언했다.

해방의 감격을 만끽하던 군중 사이에 “소련군이 서울에 입성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련군을 맞이하기 위한 시가 행렬이 서울역까지 이어졌다.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의 아내로 소련 언론사 특파원이었던 샤브쉬나는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적었다.

“학생들은 거대한 적색 천을 들고 다녔다. 거기에는 조선어와 러시아어로 “위대한 소련군과 해방군에 감사한다”고 쓰여 있었다. 거기에 얼마나 진실한 마음과 거대한 감사의 뜻이 들어 있는지….”

“서울에 입성한다”는 소문과 달리, 당시 소련군은 함경도 북부 해안 도시들에서 일본군의 맹렬한 저항에 부딪혀 고전 중이었다. 소련군은 나흘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16일 오후에야 청진을 점령했고, 이튿날에도 부령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한반도에서 일본군이 저항을 멈춘 것은 18일이었다.

해방 이튿날, 일왕은 항복했으나 소련군과 일본군의 교전은 계속되었고, 일본은 패망했으나 조선의 치안과 행정은 여전히 총독부가 맡고 있었다. 8월 16일, 대구 청년 이일재는 예정대로 일본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훗날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사람들이 아직은 해방을 확신하지 못했던 때라 나는 일본 헌병대 사람을 따라 774부대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들어간 지 이틀 뒤 아침, 일본놈들이 모두 퇴각하고 없더라고요. 결국 징병되었던 사람들은 18일 모두 해산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다니던 미쯔와 화학공장에 복귀했어요.”

일본의 패전으로 한반도에는 어둠이 물러가고, 35년 동안 잃어버렸던 빛을 되찾았다. 하지만 한국인 개개인에게 그 빛은 무채색이 아니라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깔로 기억되었다.

<참고 문헌>

기광서, ‘북한 국가의 형성과 소련’, 선인, 2018

김영희, ‘일제시기 라디오의 출현과 청취자’, 한국언론학보 제46-2호, 2002

문제안 외, ‘8·15의 기억’, 한길사, 2005

사토 다쿠미, ‘8월 15일의 신화’, 궁리, 2007

유종호, ‘나의 해방 전후’, 민음사, 2004

이기형, ‘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 1984

천정환, ‘해방기 거리의 정치와 표상의 생산’, 상허학보 제26호, 2009

파냐 이사악꼬브나 샤브쉬나, ‘1945년 남한에서’, 한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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