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살 때 피폭, 78년만에 두 정상 위령비 참배한다니 한 풀려 [한·일 정상회담 그 후]
SPECIAL REPORT - 원폭·징용 피해자들의 회상
정 회장의 부친 정주선(1920년생)씨는 1939년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히로시마의 군수공장에서 마차로 각종 물건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다 운명의 그날 아침을 만났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당시 인구 34만의 도시 히로시마는 한순간에 아비규환의 현장이 됐다. 미군이 원폭 타깃으로 히로시마를 선택한 건,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핵심 역할을 하는 군사 도시이자 군수 기지였기 때문이다. 징용으로 강제동원 됐거나, 혹은 생계를 위해 건너 온 한국인 8만명도 히로시마에 살고 있었고 이 가운데 3만명 가까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12일 경남 합천의 원폭피해자협회 사무실에서 정회장과 만났다.
Q : 피폭 당시 상황은.
A : “세 살 때라 기억이 없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들었다. 부친은 사람들이 너나 없이 개천으로 뛰어들었다는 목격담을 자주 얘기하셨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열기를 참지 못해 그렇게 한 것이다. 강물은 전부 피로 물들었고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부모님과 내가 목숨을 건진 것은 천운이었다. 다른 동네에 살던 백부님은 즉사하셨다.”
Q : 피폭 후유증은 없었나.
A : “부친은 한국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는데 힘든 일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60세에 돌아가셨다. 나도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직장 생활에도 지장이 있었고 면연력이 약해 평생 약을 달고 살았다. 더 큰 고통은 언제 갑자기 신체에 이상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고통은 2세, 3세들에게까지 이어진다.”
정회장 일가에겐 또다른 고통이 있었다. 일본에서의 피폭으로 몹쓸 병을 얻어온 것이 아니냐는 냉대와 질시였다.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타인에게 피폭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행여 자녀의 혼사길이 막힐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A : “일본으로부터는 법정 소송 끝에 건강관리 수당(1인당 180만원~400만원)과 치료비 등을 받았다. 한국 정부의 지원은 없고 지방자치단체별로 조례를 만들어 지원금을 주는 곳이 있다. 합천군의 경우 피해자가 많은 곳인데, 생활수당과 병원비 지원 등을 조례로 의무화했다. 경제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아픔을 알아주는 것이다. 액수는 적어도 나라에서 ‘우리가 당신들을 신경 쓰고 있다’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이라 고맙게 여긴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그 순간 히로시마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 받은 고통에 대한 작은 위로다.”
Q : 그런 의미에서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위령비 참배를 어떻게 평가하나.
A : “원폭 피해는 위안부 문제와 함께 일제 지배가 남긴 가장 아픈 상처다. 그 상처가 어떻게 다 지워지겠나. 하지만 일본 총리와 한국 대통령이 위령비를 찾아주는 것은 그 상처를 보듬어 안아준다는 의미가 있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가는 첫걸음이라 본다. 일본정부가 명시적으로 사과하는 것은 정치적이든 상황상으로든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잊지는 말되, 과거가 걸림돌이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과거를 반추해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A : “모두 다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참배를 할 때 각 지부 대표자 10여명이 함께 히로시마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돈이 들더라도 역사적인 순간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Q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A : “4남2녀 중 맏이였던 아버지는 21살 새신랑일 때 징용됐다. 1년여 만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아버지가 일하던 미쓰비시중공업도 삽시간에 파괴됐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몸과 마음을 모두 다친 상태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후유증으로 항상 다리를 절었는데 어렸을 때는 그 이유를 몰랐다. 자식들에게도 원폭 피해에 대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는데 방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것을 종종 보았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드셨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간신히 고국으로 돌아온 분들도 다들 다리를 절거나 평생 신경통을 앓았다. 나 역시 원인을 모르는 피부병과 고질적인 신체 능력 저하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Q : 한국인 위령비 참배는 어떻게 평가하나.
A :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반가워하실 것이라 생각하니 내 마음도 편해지는 느낌이다. 한·일간에 교류가 재개되고 소통이 이뤄지다 보니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게 아닌가 생각한다.”
Q : 강제동원 배상소송은 어떻게 되고 있나.
A : “2018년 신일철주금 소송에서 대법원 확정판결로 피해자들이 승소했다. 그런데 부친을 포함한 미쓰비시 히로시마 제작소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은 2심까지 이겼는데 5년이 되도록 대법원 판결이 나지 않고 있다. 일단 판결이 나야 보상이든 해결책이든 받아들이든 말든 할텐데 답답한 심정이다.”
Q : 만일 승소하면, 일본 기업의 돈이 아니라 한국측 재단의 돈으로 대위변제를 하기로 한 한국 정부 해법을 받아들일 것인가.
A : “과거에는 일본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사과도 받겠다는 분들이 많았는데 점점 생각이 바뀌고 있다. 현실적으로 피해자 2세들도 80세가 다 되어 가다보니 사과를 받고 보상을 받아도 살아서 받아야 의미있는 것 아니겠나라는 생각들이 있다. 그래서 일본의 진정성 어린 사과만 있다면 한국 정부가 보상해주는 돈은 받아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Q : 기시다 총리가 방한해 ‘가슴 아프다’고 표현한 것은 사과로 받아들일 수 있나.
A : “윤 대통령이 한국 측에 의한 배상을 결정하고 난 뒤에 일본 총리가 오는 것이라 이번만큼은 뭔가 더 나아간 입장 표명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가슴 아프다’는 말에 그친 것은 기대에 못미친 것이라 서운함이 남아있다.”
■ 히로시마 원폭 한국인 희생자 3만명…오부치, 일 총리론 첫 참배
이 비석은 1999년 5월 현재의 위치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희생자 전체를 위로하는 조형물은 평화기념공원 경내에 몇 가지 있지만 특정 국가 피해자를 기리는 것으로는 한국인 위령비가 유일하다.
오는 19일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함께 이 위령비에 참배할 예정이다. 일본 총리로서는 두 번째다. 일본 현직 총리로서 최초의 참배자는 오부치 게이조(1937~2000)였다. 1999년 8월 히로시마에 들렀다가 한국인 위령비가 평화공원 경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참배했다고 한다. 그는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담은 ‘김대중-오부치 선언’(1998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밖에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야마구치 대표가 2017년 이후 세 차례 위령비를 찾았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윤 대통령이 최초의 참배자로 기록될 전망이다. 역대 한국 현직 대통령은 히로시마를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2010년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원폭희생자 위령식에 참석하면서 한국인 위령비에 헌화했다.
」
합천·평택=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