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살 때 피폭, 78년만에 두 정상 위령비 참배한다니 한 풀려 [한·일 정상회담 그 후]

원동욱 2023. 5. 13.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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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 원폭·징용 피해자들의 회상
12일 오전 정원술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이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원폭자료관에서 전시물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송봉근 기자
“처음 소식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고 이대로 잊혀지는 줄 생각하고 살았지요.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죠. 78년의 세월, 세살박이 어린 아이가 팔순을 넘겼습니다. 이제야 한(恨)의 끝자락이 풀리는 느낌입니다.”
정원술 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이 12일 경남 합천군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사무실에서 중앙SUNDAY와 인터뷰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정원술(80) 한국원폭피해자 협회장의 주름진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히로시마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찾기로 했다는 발표를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또한번 울컥해진다고 했다. 한평생 ‘피폭’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온 그에게 가장 절실했던 건, 누군가의 관심이었다. 과거사 청산이나 사죄와 반성, 화해와 용서 등 거창한 담론도 결국은 억울한 희생과 불가항력의 고통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다.

정 회장의 부친 정주선(1920년생)씨는 1939년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히로시마의 군수공장에서 마차로 각종 물건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다 운명의 그날 아침을 만났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당시 인구 34만의 도시 히로시마는 한순간에 아비규환의 현장이 됐다. 미군이 원폭 타깃으로 히로시마를 선택한 건,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핵심 역할을 하는 군사 도시이자 군수 기지였기 때문이다. 징용으로 강제동원 됐거나, 혹은 생계를 위해 건너 온 한국인 8만명도 히로시마에 살고 있었고 이 가운데 3만명 가까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12일 경남 합천의 원폭피해자협회 사무실에서 정회장과 만났다.

경남 합천군 합천원폭자료관 1층 원폭피해전시실에 전시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모습. 송봉근 기자

Q : 피폭 당시 상황은.
A : “세 살 때라 기억이 없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이야기를 들었다. 부친은 사람들이 너나 없이 개천으로 뛰어들었다는 목격담을 자주 얘기하셨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사람들이 열기를 참지 못해 그렇게 한 것이다. 강물은 전부 피로 물들었고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부모님과 내가 목숨을 건진 것은 천운이었다. 다른 동네에 살던 백부님은 즉사하셨다.”

Q : 피폭 후유증은 없었나.
A : “부친은 한국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었는데 힘든 일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60세에 돌아가셨다. 나도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직장 생활에도 지장이 있었고 면연력이 약해 평생 약을 달고 살았다. 더 큰 고통은 언제 갑자기 신체에 이상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고통은 2세, 3세들에게까지 이어진다.”
정회장 일가에겐 또다른 고통이 있었다. 일본에서의 피폭으로 몹쓸 병을 얻어온 것이 아니냐는 냉대와 질시였다.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타인에게 피폭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다. 행여 자녀의 혼사길이 막힐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경남 합천군 합천원폭자료관 1층 원폭피해전시실에 전시된 피해자의 편지. 송봉근 기자
Q : 일본 정부로부터의 배상이나 건강, 복지에 대한 한국 정부 지원을 받고 있나.
A : “일본으로부터는 법정 소송 끝에 건강관리 수당(1인당 180만원~400만원)과 치료비 등을 받았다. 한국 정부의 지원은 없고 지방자치단체별로 조례를 만들어 지원금을 주는 곳이 있다. 합천군의 경우 피해자가 많은 곳인데, 생활수당과 병원비 지원 등을 조례로 의무화했다. 경제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아픔을 알아주는 것이다. 액수는 적어도 나라에서 ‘우리가 당신들을 신경 쓰고 있다’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이라 고맙게 여긴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그 순간 히로시마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 받은 고통에 대한 작은 위로다.”
12일 경남 합천군 한국원폭피해자협회 2층사무실에서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 유영희 한국원폭피해협회 사무국장, 정원술 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 박미옥 과장(왼쪽부터)이 일본 히로시마 방문 관련 회의를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Q : 그런 의미에서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위령비 참배를 어떻게 평가하나.
A : “원폭 피해는 위안부 문제와 함께 일제 지배가 남긴 가장 아픈 상처다. 그 상처가 어떻게 다 지워지겠나. 하지만 일본 총리와 한국 대통령이 위령비를 찾아주는 것은 그 상처를 보듬어 안아준다는 의미가 있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가는 첫걸음이라 본다. 일본정부가 명시적으로 사과하는 것은 정치적이든 상황상으로든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잊지는 말되, 과거가 걸림돌이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과거를 반추해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Q : 다른 피폭자들의 생각도 비슷한가.
A : “모두 다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참배를 할 때 각 지부 대표자 10여명이 함께 히로시마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돈이 들더라도 역사적인 순간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경남 합천군 합천원폭자료관 1층 원폭피해전시실에 전시된 원자폭탄 피해 모습. 송봉근 기자
정씨가 회장으로 있는 원폭피해자협회에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1817명의 생존 피폭자들이 가입되어 있다. 대부분 정회장처럼 10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피폭당한 사람들이다. 역대 회원 가운데 3092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피해자협회는 경남 합천의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 입주해 있다. 이 복지관은 1996년 일본의 원폭피해자복지기금 40억엔으로 건립한 것이다. 합천에 이 복지관을 지은 것은 피폭자 가운데 이곳 출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시민들이 와서 느끼고 기릴 수 있는 평화공원과 추모시설을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 남은 바람”이라고 말했다.
경남 합천군 합천원폭자료관 1층 원폭피해전시실에 전시된 원자폭탄 피해 모습. 송봉근 기자
19일 이뤄질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위령비 참배에는 또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히로시마는 군수공장이 많았던 곳이다보니 한국인 희생자 가운데는 강제징용된 사람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기시다 총리가 원폭 피해자에 참배하는 것은 징용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아픈 마음’을 표시하는 의미도 담길 수 있다. 2003년 세상을 떠난 박남순씨도 원폭 피해와 징용 피해가 중첩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그의 아들 박상복씨를 포함,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 제작소로 징용된 14명의 유족들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2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이 났고, 현재 대법원에 계류중이다. 박씨는 원폭피해자 기호(경기·충청)지부장을 맡고 있다.
지난 2월 22일 오후 방상복 원폭피해자 기호 지부장을 서울 노원구 한국원폭피해전시관에서 중앙SUNDAY가 인터뷰 했다. 최영재 기자

Q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A : “4남2녀 중 맏이였던 아버지는 21살 새신랑일 때 징용됐다. 1년여 만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아버지가 일하던 미쓰비시중공업도 삽시간에 파괴됐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몸과 마음을 모두 다친 상태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후유증으로 항상 다리를 절었는데 어렸을 때는 그 이유를 몰랐다. 자식들에게도 원폭 피해에 대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는데 방에서 조용히 흐느끼는 것을 종종 보았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드셨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간신히 고국으로 돌아온 분들도 다들 다리를 절거나 평생 신경통을 앓았다. 나 역시 원인을 모르는 피부병과 고질적인 신체 능력 저하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Q : 한국인 위령비 참배는 어떻게 평가하나.
A :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반가워하실 것이라 생각하니 내 마음도 편해지는 느낌이다. 한·일간에 교류가 재개되고 소통이 이뤄지다 보니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게 아닌가 생각한다.”

Q : 강제동원 배상소송은 어떻게 되고 있나.
A : “2018년 신일철주금 소송에서 대법원 확정판결로 피해자들이 승소했다. 그런데 부친을 포함한 미쓰비시 히로시마 제작소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은 2심까지 이겼는데 5년이 되도록 대법원 판결이 나지 않고 있다. 일단 판결이 나야 보상이든 해결책이든 받아들이든 말든 할텐데 답답한 심정이다.”

Q : 만일 승소하면, 일본 기업의 돈이 아니라 한국측 재단의 돈으로 대위변제를 하기로 한 한국 정부 해법을 받아들일 것인가.
A : “과거에는 일본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사과도 받겠다는 분들이 많았는데 점점 생각이 바뀌고 있다. 현실적으로 피해자 2세들도 80세가 다 되어 가다보니 사과를 받고 보상을 받아도 살아서 받아야 의미있는 것 아니겠나라는 생각들이 있다. 그래서 일본의 진정성 어린 사과만 있다면 한국 정부가 보상해주는 돈은 받아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Q : 기시다 총리가 방한해 ‘가슴 아프다’고 표현한 것은 사과로 받아들일 수 있나.
A : “윤 대통령이 한국 측에 의한 배상을 결정하고 난 뒤에 일본 총리가 오는 것이라 이번만큼은 뭔가 더 나아간 입장 표명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가슴 아프다’는 말에 그친 것은 기대에 못미친 것이라 서운함이 남아있다.”

■ 히로시마 원폭 한국인 희생자 3만명…오부치, 일 총리론 첫 참배

1999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는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 [중앙포토]
히로시마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는 1970년 재일동포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이다. 검은 대리석의 비석 앞면에는 한자로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이우 공 전하 외 2만여 영령”이라 적혀져 있다. 이우 공(公)은 당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고종의 손자다. 비문 뒷면에는 보다 자세한 내용이 한글로 적혀있다. “1945년 8월 6일의 원폭 투하로 인해 2만 여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히로시마 시민 20만 희생자의 1할에 달하는 한국인 희생자 수는 묵과할 수 없는 숫자이다.” 실제로 히로시마에서 희생된 한반도 출신자는 비석 표기보다 더 많은 3만명으로 추정된다.

이 비석은 1999년 5월 현재의 위치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희생자 전체를 위로하는 조형물은 평화기념공원 경내에 몇 가지 있지만 특정 국가 피해자를 기리는 것으로는 한국인 위령비가 유일하다.

오는 19일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함께 이 위령비에 참배할 예정이다. 일본 총리로서는 두 번째다. 일본 현직 총리로서 최초의 참배자는 오부치 게이조(1937~2000)였다. 1999년 8월 히로시마에 들렀다가 한국인 위령비가 평화공원 경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참배했다고 한다. 그는 과거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담은 ‘김대중-오부치 선언’(1998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밖에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야마구치 대표가 2017년 이후 세 차례 위령비를 찾았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윤 대통령이 최초의 참배자로 기록될 전망이다. 역대 한국 현직 대통령은 히로시마를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2010년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원폭희생자 위령식에 참석하면서 한국인 위령비에 헌화했다.




합천·평택=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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