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눈으로 만든 공연…신화·미술이 춤을 춘다

유주현 2023. 5. 13.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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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그리스 공연 마법사’ 파파이오아누
14일까지 국립극장에서 공연되는 ‘잉크’는 빛과 어둠, 물과 인체 같은 원초적 요소로 놀랄만한 미장센을 연출한다. [사진 Julian Mommert]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을 진두지휘했던 ‘그리스인 공연 마법사’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가 신작으로 한국을 찾았다. 12일부터 14일까지 국립극장의 해외 초청작으로 아시아 초연되는 ‘잉크’다. 2020년 이탈리아 토리노 댄스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지난 1월 아테네 콘서트홀에서 월드 투어를 시작했다.

파파이오아누는 연출가이자 안무가, 무대·조명 디자이너이면서 배우이기도 한 ‘르네상스 맨’으로, 아테네 올림픽에서 세계적 예술가로 떴다.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이자 최초의 근대 올림픽 개최지에서 열린 21세기 첫 올림픽에서, 그리스 신화를 비롯해 인류 역사를 대표하는 이미지들을 되살려 민족과 지구와 우주를 아우르는 장엄한 스펙터클로 세계인을 매료시킨 것. 국내에서는 2017년 유럽 연극상 수상작 ‘위대한 조련사’를 공연한 적 있지만, 그가 직접 출연하는 무대를 보는 건 처음이라 두 달 전부터 전석 매진될 만큼 공연계 관심이 뜨겁다.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 연출로 유명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
“파파이오아누 시학의 정수”라 불리는 ‘잉크’는 어떤 작품일까. 텅 빈 무대에 옷을 입은 남자와 홀딱 벗은 남자, 딱 둘만 있는 2인극이다. 시처럼 알쏭달쏭하고 여백 가득하지만, 물과 빛 같은 원초적 요소만으로 놀랄 만한 장관을 빚어내는 솜씨가 ‘과연 연금술사다’ 싶다. 파파이오아누는 “두 번째로 만든 2인극인데, 둘 다 내가 직접 출연한 이유가 있다”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2인극은 단순한 요소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서 매력적이죠. 연출자이자 서술자로서, 주어진 최소한에서 모든 걸 짜내야 하니까요. 제한된 자원으로 가능한 무엇이든 해낸다는 게 신체성의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도전이고요.”

그럼 왜 ‘잉크’일까. 마치 잉크 속에 빠진 듯 어두운 무대다. 태고와 여성을 상징하는 물보라 속에서 두 남자가 문어와 함께 뒹군다. 억누르는 자와 벗어나려는 자의 씨름이 잉크로 쓰여진 인류의 역사에 대한 거대한 은유 같다.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제우스로부터 시작된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을 끝없이 오간다. “문어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신비로운 생명체이고, 잉크를 생산하죠. 마치 검은 정자같이 신체적이고 본능적 요소인 잉크가 인간이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도구가 되잖아요. 신체적인 것이 영적인 것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내 작품에 어울리는 제목이에요.”

연출가·디자이너·배우인 ‘르네상스 맨’

‘잉크’ ⓒJulian Mommert
오직 인간의 몸으로 펼치는 100% 아날로그의 ‘단순하고 고요한’ 무대가 신비롭게도 ‘웅장하고 고귀한’ 아우라를 뿜는다. ‘Noble Simplicity, Quiet Grandeur(고귀하며 단순하고, 고요하며 웅장한)’는 18세기 미술사학자 빙켈만이 고대 그리스 예술의 미학을 정의한 말인데, 파파이오아누의 세계도 딱 그렇다. 사실 그리스 예술은 세계인의 미의식을 일정 부분 지배한다. 서양미술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 예술이라서다. 미의 화신 비너스, 천하장사 헤라클레스, 전쟁의 신 아테나처럼 대리석에 새겨져 유럽 박물관에 버티고 선 신들의 육체를 무대 위로 데려오는 것이 파파이오아누다. “나는 대사가 없는 하이브리드 예술로 세계의 관객과 소통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원형(archetype)’을 찾는데,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리스 신화와 만나게 되죠. 예컨대 나르시시즘처럼, 그리스 신화에는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원형이 있잖아요. 내가 그리스인이기도 하고요.”
‘잉크’ ⓒJulian Mommert
인체의 움직임에 독특한 트릭을 쓰는 퍼포먼스로 미술사 속 강렬한 이미지들을 재현해 인간을 이야기하는 그의 작업은 그 어떤 무대와도 닮지 않았다. 자칭 “내가 가진 역량과 스킬로 고안한, 연극과 무용 사이 하이브리드 장르”라고 정의하는 그의 세계는 ‘미술과 공연 사이’에 있기도 하다. 순수미술을 전공한 그의 유니크함은 ‘화가의 눈’으로 공연을 만든다는 데 있다. ‘잉크’에도 루벤스나 고야의 ‘아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엘 그레코의 ‘톨레도’와 ‘라오콘’,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 일본 우키요에 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해녀와 문어’ 등 미술사 속에서 차용한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나는 종이보다 무대 위에서 좋은 화가인 것 같아요. 공연의 매력은 나를 다른 예술가들이나 동시대 시민들과 소통하게 만든다는 점이죠. 화가였을 때는 갤러리를 통해 제한된 사람들만 만날 수 있었다면, 무대예술이 거기서 나를 꺼내줬어요.”
‘잉크’ ⓒJulian Mommert
파파이오아누가 차용한 명화 속 이미지들은 무대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탈바꿈되어 살아난다. 신체를 왜곡시키고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으로 연출하는 기괴한 장면들은 움직이는 초현실주의 회화를 보는 듯하다. “리얼리즘 너머의 우주를 탐구하고 싶고, 마치 꿈속 같은 세계가 내가 남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영역”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잉크’ ⓒJulian Mommert
하지만 말 없는 남의 꿈 속에 들어가야 하는 관객은 헤맬 수 있다. 두 남자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저토록 싸우는 걸까. 그는 “애초에 정해진 서사는 없다”고 단언한다. “두 남자와 물을 뿜는 장치만으로 시작한 작품이에요. 과정 속에서 아버지, 인간의 욕망, 어둠 같은 서사가 생겨났죠. 심리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느낌도 있지만, 이해 못할까 봐 두려워하진 마세요. 무의식으로부터 직접 흘러나오는 연극도 있을 수 있거든요. 맛이나 음악, 사람의 손길을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공연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다른 해석도 기다립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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