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품어 더 빛난다, 애물을 보물로 만드는 연금술사
‘업사이클링 주얼리’ 디자이너 샐리 손
보석 재활용, 지구를 위한 작은 실천
“오래된 주얼리들을 해체하고 재해석해서 새로운 디자인을 입히는 거예요. 명품 브랜드가 인기를 얻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결혼 예물로 시어머님이 며느리에게 보석 세트를 선물하는 게 유행이었잖아요. ‘5세트(다이아몬드·루비·사파이어·에메랄드·진주)를 받았네, 7세트를 받았네’ 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장롱 속에 모셔만 두더라고요. 오래 전 디자인이라 촌스러우니까요. 그걸 요즘 감각에 맞는 주얼리로 재탄생시키는 거죠.”
값비싼 보석이 달려 있어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올드 주얼리는 애매한 존재다. 선물해 주시고 물려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신경은 쓰이지만 착용하고 싶지는 않은, 몇 십 년 동안 하나하나 사 모은 건데 다시 보니 요즘 감각에 뒤떨어지고 나이와도 안 맞아 처치곤란한 애물단지.
지인이 보내준 주얼리 보석들은 사이즈도 색도 다 달랐다. 샐리는 이것들을 다 해체한 후 한 데 모아 볼륨 있는 귀걸이를 만들었다. 색이 다른 진주가 마치 사람의 머리처럼 보이는 귀걸이 한 쌍에는 색이 다른 보석이 무려 7개 이상 조합됐다. 덕분에 어느 귀족 부부가 화려한 파티 의상을 입은 모습이 연상된다. 주얼리 전문가인 윤성원 한양대 보석학전공 교수는 “각기 다른 컬러로 개성이 튀는 보석들을 하나의 주얼리에 조화롭게 결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샐리 손의 컬러 감각은 정말 천재적”이라고 평했다. 이 귀걸이 사진은 윤 교수가 최근 발간한 책 『젬스톤-매혹의 컬러』에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전설 같은 주얼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게재됐다.
“어느 날 찾아온 고객이 낡은 시계를 보여주며 ‘30년 전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이 차고 있던 시계’라며 좀 더 의미 있게 간직하고 싶다 하더군요. 오래 전부터 작업했던 테마인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를 모티프로 목걸이를 만들었죠. 완성품을 찾으러 남편이 왔었는데 ‘오늘이 아내 생일인데 우리 부부에게 너무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다’고 말해줘서 뿌듯했어요. 명품 브랜드가 인기 있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도 사용하고 싶은 디자인 때문이죠. 자식들이 탐을 낼만큼 공감대를 부르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시간의 힘’은 샐리의 작품 세계에서 주요한 테마다.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아이를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던 그가 우연히 보석으로 유명한 GIA(Gemology Institute of America)에서 공부를 시작해 주얼리 디자이너로서 생애 처음 선보인 작품도 ‘시간’과 연관이 깊다.
“파리를 여행하다 빈티지 숍에서 2000년 전 제작한 고대 비즈(도자기 구슬)를 발견하고 무작정 빠져들었어요. 이란·티베트·네팔·아프리카·이탈리아 등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백, 수천 년 전 만들어진 고대 비즈들을 사 모았죠.”
‘고대 비즈 팔찌’ 미셸 오바마도 찾아
“그 전에 한국의 한 명품 백화점에 입점을 의뢰했는데 거절당했어요. 팔찌를 채우기 쉽게 후크 없이 고무줄로 비즈들을 연결했는데 한국 백화점 담당자가 ‘어떻게 이렇게 비싼 가격에 팔면서 뻔뻔하게 고무줄을 사용하냐’며 ‘이렇게 비상식적인 디자이너와는 일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웃음) 그런데 버그도프굿맨 주얼리 담당자는 바로 그 점을 신선하게 생각했어요.”
어린 시절 사랑했던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 그려진 시계를 다양한 컬러의 보석들과 조합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몽당연필을 테마로 한 ‘펜슬’ 시리즈도 ‘시간-기억’이 테마다. 특히 몽당연필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와의 추억이 영감이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쯤 지났을 때 잊고 있던 신발 상자를 발견했는데 안에는 아버지가 보낸 항공 우편물로 가득했죠. 미국으로 유학 오고부터 아버지는 멀리 있는 딸의 안부를 묻기 위해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편지를 써 보내셨죠. 그 사랑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샐리가 만든 엄지손톱만한 작은 몽당연필에는 연필 지우개뿐 아니라 눈곱만한 크기의 연필심까지 세밀하게 표현돼 있다. 연필에 ‘be the author of your life’라는 글귀를 새겨넣기도 했다. 연필로 글을 쓰듯 당신의 삶을 써나가라는 의미다.
“보석보다 중요한 건 이야기를 담은 디자인이에요. 내가 디자인한 주얼리가 사람들을 소통하게 하고,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꿈꾸게 하는 매개체가 됐으면 좋겠어요. 육신과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화려한 보석이 무슨 소용이에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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