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품어 더 빛난다, 애물을 보물로 만드는 연금술사

서정민 2023. 5. 13.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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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사이클링 주얼리’ 디자이너 샐리 손
주얼리 디자이너 샐리 손. 고대 비즈와 유색 보석들로 장식한 참을 나일론 고무줄로 연결한 팔찌가 대표작이다. 브로치는 몽당연필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펜슬’ 시리즈. 최기웅 기자
업사이클링(upcycling)이란 쓸모 없거나 버려지는 물건을 새롭게 디자인해 예술적·환경적 가치가 높은 물건으로 재탄생 시키는 것을 말한다. 환경보호를 위한 ‘재활용’ ‘새활용’이 목적인 만큼 주로 사용되는 재료들은 폐차되는 자동차의 시트, 버려지는 나일론 현수막 등 쓰레기들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보석 디자이너 샐리 손(한국 이름 윤화경)의 눈에는 값비싼 보석도 업사이클링 재료가 된다. “쓰지 않고 장롱 속에 모셔만 두는 보석이라면 값이 비싼 쓰레기일 뿐이죠.”

보석 재활용, 지구를 위한 작은 실천

미키 마우스 시계에 에메랄드 장식을 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목걸이. [사진 샐리 손]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가 최근 활동 거점을 서울로 옮기면서 한남동에 작은 주얼리 부티크 겸 갤러리를 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이른바 ‘업사이클링 주얼리’ 디자인이다.

“오래된 주얼리들을 해체하고 재해석해서 새로운 디자인을 입히는 거예요. 명품 브랜드가 인기를 얻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결혼 예물로 시어머님이 며느리에게 보석 세트를 선물하는 게 유행이었잖아요. ‘5세트(다이아몬드·루비·사파이어·에메랄드·진주)를 받았네, 7세트를 받았네’ 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장롱 속에 모셔만 두더라고요. 오래 전 디자인이라 촌스러우니까요. 그걸 요즘 감각에 맞는 주얼리로 재탄생시키는 거죠.”

값비싼 보석이 달려 있어 함부로 버릴 수도 없는 올드 주얼리는 애매한 존재다. 선물해 주시고 물려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신경은 쓰이지만 착용하고 싶지는 않은, 몇 십 년 동안 하나하나 사 모은 건데 다시 보니 요즘 감각에 뒤떨어지고 나이와도 안 맞아 처치곤란한 애물단지.

7개 이상의 유색 보석을 조합한 업사이클링 귀걸이. [사진 샐리 손]
“어느 날 지인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다가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내게 맡겨 봐’ 했죠.”

지인이 보내준 주얼리 보석들은 사이즈도 색도 다 달랐다. 샐리는 이것들을 다 해체한 후 한 데 모아 볼륨 있는 귀걸이를 만들었다. 색이 다른 진주가 마치 사람의 머리처럼 보이는 귀걸이 한 쌍에는 색이 다른 보석이 무려 7개 이상 조합됐다. 덕분에 어느 귀족 부부가 화려한 파티 의상을 입은 모습이 연상된다. 주얼리 전문가인 윤성원 한양대 보석학전공 교수는 “각기 다른 컬러로 개성이 튀는 보석들을 하나의 주얼리에 조화롭게 결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샐리 손의 컬러 감각은 정말 천재적”이라고 평했다. 이 귀걸이 사진은 윤 교수가 최근 발간한 책 『젬스톤-매혹의 컬러』에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전설 같은 주얼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게재됐다.

투명·핑크·옐로 다이아몬드를 조화시킨 업사이클링 반지. [사진 샐리 손]
샐리 손이 말하는 업사이클링 주얼리는 비단 보석의 경제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그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시간(기억)의 힘’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값비싼 보석이 없어도 그의 디자인은 빛을 발한다. ‘달리 시계’가 대표적이다.

“어느 날 찾아온 고객이 낡은 시계를 보여주며 ‘30년 전 남편과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이 차고 있던 시계’라며 좀 더 의미 있게 간직하고 싶다 하더군요. 오래 전부터 작업했던 테마인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를 모티프로 목걸이를 만들었죠. 완성품을 찾으러 남편이 왔었는데 ‘오늘이 아내 생일인데 우리 부부에게 너무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다’고 말해줘서 뿌듯했어요. 명품 브랜드가 인기 있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도 사용하고 싶은 디자인 때문이죠. 자식들이 탐을 낼만큼 공감대를 부르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오래된 반지의 다이아몬드를 잘게 커팅해서 재디자인한 업사이클링 팔찌. [사진 샐리 손]
전 세계 이름 있는 광산에서 채굴되는 보석의 양은 점점 줄고 있다. 자원의 고갈이다. 새로운 보석을 채굴하고 주얼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또 많은 에너지와 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보석 주얼리를 사기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재활용·새활용하는 것도 요즘 대두되고 있는 지구를 위한 지속가능한 삶의 실천 방법 중 하나다.

‘시간의 힘’은 샐리의 작품 세계에서 주요한 테마다.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아이를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던 그가 우연히 보석으로 유명한 GIA(Gemology Institute of America)에서 공부를 시작해 주얼리 디자이너로서 생애 처음 선보인 작품도 ‘시간’과 연관이 깊다.

“파리를 여행하다 빈티지 숍에서 2000년 전 제작한 고대 비즈(도자기 구슬)를 발견하고 무작정 빠져들었어요. 이란·티베트·네팔·아프리카·이탈리아 등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백, 수천 년 전 만들어진 고대 비즈들을 사 모았죠.”

‘고대 비즈 팔찌’ 미셸 오바마도 찾아

연필심·지우개까지 세밀하게 표현한 ‘펜슬’ 시리즈 목걸이 펜던트. [사진 샐리 손]
그렇게 모은 고대 비즈를 나일론 고무줄로 연결해 팔찌를 만들었는데 이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2007년 한국 주얼리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명품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에 입점했다.

“그 전에 한국의 한 명품 백화점에 입점을 의뢰했는데 거절당했어요. 팔찌를 채우기 쉽게 후크 없이 고무줄로 비즈들을 연결했는데 한국 백화점 담당자가 ‘어떻게 이렇게 비싼 가격에 팔면서 뻔뻔하게 고무줄을 사용하냐’며 ‘이렇게 비상식적인 디자이너와는 일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웃음) 그런데 버그도프굿맨 주얼리 담당자는 바로 그 점을 신선하게 생각했어요.”

복숭아 빛깔 콩크 진주, 핑크 사파이어, 투명 다이아몬드를 톤온톤으로 조합한 반지. [사진 샐리 손]
귀한 고대 비즈와 값비싼 다이아몬드들을 싸구려 나일론 고무줄로 엮은 팔찌를 먼저 알아본 고객도 예술가들이었다. 구겐하임 뮤지엄과 아스펜 아트 뮤지엄 CEO가 단골 고객이 됐다. 리즈 위더스푼, 오프라 윈프리, 귀네스 팰트로 등의 스타들도 샐리를 찾았고 미셸 오바마는 시카고에 있는 편집숍 이크람을 통해 샐리 손의 팔찌를 구매했다.

어린 시절 사랑했던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 그려진 시계를 다양한 컬러의 보석들과 조합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몽당연필을 테마로 한 ‘펜슬’ 시리즈도 ‘시간-기억’이 테마다. 특히 몽당연필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와의 추억이 영감이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쯤 지났을 때 잊고 있던 신발 상자를 발견했는데 안에는 아버지가 보낸 항공 우편물로 가득했죠. 미국으로 유학 오고부터 아버지는 멀리 있는 딸의 안부를 묻기 위해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편지를 써 보내셨죠. 그 사랑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샐리가 만든 엄지손톱만한 작은 몽당연필에는 연필 지우개뿐 아니라 눈곱만한 크기의 연필심까지 세밀하게 표현돼 있다. 연필에 ‘be the author of your life’라는 글귀를 새겨넣기도 했다. 연필로 글을 쓰듯 당신의 삶을 써나가라는 의미다.

“보석보다 중요한 건 이야기를 담은 디자인이에요. 내가 디자인한 주얼리가 사람들을 소통하게 하고,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꿈꾸게 하는 매개체가 됐으면 좋겠어요. 육신과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면 화려한 보석이 무슨 소용이에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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