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칩과 뭐가 다르냐” 하더니…

박해리 2023. 5. 13.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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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 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칩 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크리스 밀러 지음
노정태 옮김
부키

이 책에 따르면,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유럽·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반도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테크’란 단어에서 검색엔진이나 소셜미디어를 떠올렸을 뿐, 실리콘 웨이퍼와 연관 짓지 않았다. 한데 오늘날 반도체는 연산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기기에 탑재된다. 첨단 군사무기의 성능도 반도체가 좌우한다

현대의 필수품목이 된 반도체 생산은 대부분 동아시아에서 이뤄진다. 저임금 공장 노동자를 찾던 미국 기업가들이 그 풍부한 노동력에 매력을 느꼈고, 이 지역의 정부와 기업은 생산기지 역할을 자임했다.

결과적으로 대만은 세계에서 소비하는 연산력의 37%에 해당하는 반도체를,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한국의 두 기업은 세계 메모리 칩의 44%를 생산하고 있다. 최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는 네덜란드 기업 ASML에 100% 의존한다. 경제 영역에서 이토록 적은 수의 기업에 좌우되는 분야는 오직 반도체뿐이다.

반도체 칩은 현대 의 필수품목이 됐다. 사진은 인쇄 회로 기판에 장착된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의 국제관계 전문가인 저자는 반도체를 둘러싼 현재의 복잡한 세계 상황을 산업뿐 아니라 정치·경제·군사적 측면까지 포괄해 조망한다. 기술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돼 있지만 딱딱하고 어렵기보다는 스릴러물처럼 흥미진진하다.

저자는 철저히 미국의 관점에서 반도체 패권전쟁을 바라보는데, 반도체 생산 주도권을 동아시아에 내준 역사는 냉철한 반성과 함께 회고한다. 1980년대 워싱턴에서는 반도체가 전략적 자원이란 주장에 대해 “제트엔진, 산업용 로봇보다 전략적인가”라는 반발이 일었다. 레이건 정부의 한 경제학자는 “감자 칩과 컴퓨터 칩이 뭐가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결국 미국보다 저렴하게 칩을 생산하는 곳이 있다면 그런 칩을 사는 것이 이득일 거라는 논리가 우세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세계화’라는 명제 아래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높여줬다. 저자는 “반도체 제조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은 ‘세계화’가 아니라 ‘대만화’였다”며 “기술은 퍼지지 않고 대체 불가능한 한 줌의 기업이 독점했을 뿐”이라고 표현했다.

그 한 줌의 기업이 바로 TSMC. 미국 반도체 기업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CEO가 되는 꿈을 이루지 못한 모리스 창에게 대만 정부는 반도체 산업 전권을 맡기고 백지수표를 써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대만으로 건너가 회사를 설립하는데, 이때 인쇄술의 발명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 이뤄졌다고 저자는 묘사한다. 바로 반도체 설계와 제조를 분리한 것. TSMC는 제조에 특화된 전문기업을 표방하고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며 고객들이 설계한 칩을 대량으로 생산한다.

이병철 삼성전자 창업 회장을 ‘무슨 일을 해도 이익을 낼 수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등 한국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다. 저자는 차고에서 태어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과 달리, 한국에서는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은행에서 저리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거대 재벌의 산물인 하이테크 기업이 반도체 산업을 이끌었고 결국 메모리 시장의 선두를 차지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한국이 메모리 칩 제조 선두를 지키며 동시에 로직 칩 제조의 지분도 늘리려고 한다며, 이재용 회장의 2021년 보석도 경제적 이유가 있다고 짚었다.

책의 말미에서는 대만의 지정학적 위험을 강조한다. 디지털 세계의 심장을 두고 전운이 감도는 지금, 저자가 600쪽에 걸쳐 서술한 반도체 전쟁의 역사는 미국이 반도체 패권 장악을 위해 칩스법을 제정하고 대중(對中) 제재에 나서는 당위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인 듯 보이기도 한다. 미국 안팎의 반도체 업계, 학계, 정부 인사 등 100여명을 인터뷰해 쓴 책이자 반도체 발전을 이끌어온 인물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책이기도 하다.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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