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림녹화 세계 유일 성공사례, 유네스코 유산으로 남겨야
이경준 산림정책연구회장
한국산림정책연구회장을 맡고 있는 이경준 서울대학교 산림과학부 명예교수는 지난 3일 문화재청에서 한국의 산림녹화사업 기록을 세계기록유산(MoW)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한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유네스코는 내년에 심사를 진행한다. 지난 9일 서울 국립산림과학원에 자리잡은 한국산림정책연구회 사무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정부가 30여년에 걸쳐 나무심기를 장려하고, 관리한 기록 1만여건을 7년간 발로 뛰어 모았다”며 “북한을 비롯해 산림녹화가 필요한 국가가 참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Q : 산림녹화의 가치는.
A : “연간 7조원 규모의 임산물이 생산된다. 여기에 온실가스 흡수, 산소 생산, 대기질 개선 등을 공익적 가치로 환산해보면 2020년 기준 259조원에 달한다. 국내총생산(GDP)의 13.3%에 해당하는 규모다. 역사적으로도 폐허가 된 국토에서 반세기 만에 울창한 산림을 만들어낸 유일한 사례다. 유엔이 공식 발표한 조림 성공 국가는 서독, 영국, 뉴질랜드, 한국인데 다른 나라는 국토의 일부만 성공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한국의 산림녹화는 말 그대로 ‘대과업’이다.”
산림녹화 1만건 기록 7년간 발로 뛰어 모아
Q : 일제강점기 때 산림수탈로 국토 황폐화가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는데.
A : “반만 맞는 주장이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목재를 수탈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산이 황폐해진 것은 우리 조상의 잘못이다. 역사 문헌을 보면 삼국시대에 평균 20~30년에 한 번 발생하던 홍수가 고려 시대에는 10년에 한 번, 조선 시대엔 5년에 한 번씩 찾아왔다. 일본이 지배하기 전부터 산에 나무가 없는 민둥산 상태였다는 증거다. 5000년 역사 내내 나무를 연료로 썼으니 남아날 수가 있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마을 곳곳에 아까시나무를 심어 연료를 자급자족하고, 흙이 쏟아지지 않도록 사방공사를 했다. 일본이 아까시나무를 심지 않았더라면 산림녹화사업은 훨씬 오래 걸렸을 것이다.”
A : “한국전쟁 후 판자촌에 모인 사람들이 주변 산의 나무는 물론 풀뿌리와 낙엽까지 긁어 땔감으로 쓰면서 국토 대부분이 민둥산이 됐다. 농사지을 땅도 마땅치 않으니 산에 불을 질러 생활하는 화전민 수도 상당했다. 공장을 세우려해도 공업용수마저 구하기 어려웠다. 당시 유엔에서 한국의 산림이 복구될 수 없다는 보고서를 낼 정도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나무심기를 독려하면서 정부가 꾸준히 묘목과 재원을 지원했다. 70년대 이후 새마을운동과 맞물리면서 국민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풀뿌리처럼 끈질기게 나무를 심었다. 이런 ‘민초조림’이 없었다면 산림녹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A : “내무부 소속의 전국 공무원이 직접 산림녹화 현장에 나섰다. 임학 전공 대학생·대학원생도 동원했다. 당시 임명직이던 도지사, 군수, 시장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1973년엔 김현옥 당시 내무부 장관이 검목 제도를 신설했다. 전국 모든 지역의 활착률(옮겨 심거나 접목한 나무가 제대로 산 비율)을 조사하는 산림녹화 관리제도를 구축한 것이다. 100ha 이상 산불이 나면 지자체장이 해임되기도 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서슬퍼렇던 군사정부의 강력한 정책이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런 과정을 담은 공문서 1만여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통일 대비, 북한 산림녹화 원조 시작해야
Q :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공한 셈인가.
A : “정부는 나무를 심는 일이 국가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 민족 특유의 두레 문화, 협동 정신을 활용해 나무 심기에 투입했다. 마을 자치공동체인 산림계를 활용해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나무 심기에 동참하도록 유도했다. 중요한 점은 그저 노동력을 동원한 게 아닌 인센티브를 꾸준히 부여했다는 점이다. 농한기 사방사업 일자리 제공, 묘목과 비료 무상 공급, 연료림 조성, 마을 지정양묘로 소득을 창출해줬다. 숲이 우거지는만큼 영농 환경이 좋아지는데 누가 마다하겠나.”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탈북자들이 가장 놀라는 점 가운데 하나가 산마다 푸르른 숲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마구잡이로 나무를 자르고, 산을 개간해 옥수수를 심은 북한에서는 대다수의 산이 민둥산이다. 이 때문에 비만 내리면 홍수가 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Q : 앞으로 조림사업 기록을 어떻게 써야 할까.
A : “국제원조 수단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특히 산림녹화사업의 경험을 충분히 적용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나무를 심어주는 방식의 원조는 지원이 끊어지면 다시 황폐해지기 쉽다. 대신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식량이나 시드머니를 지급하고, 우물파기, 건물이나 교량 건설 같은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꾸준히 조림사업을 지속할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발적 참여까지 끌어내면 향후 사업단이 철수해도 지역 내에서 자율적으로 사업이 이어진다. 북한은 우리와 기후와 조건이 비슷해 성공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유엔 등의 제재로 여의치 않은 상황이지만 통일을 고려하면 지금 당장 산림녹화 원조를 시작해야 한다.”
■ 민간 연구회가 첫 등재 준비·신청, 이젠 국가가 나서야 할 때
「 이경준 명예교수는 산림청 퇴임 공무원 출신 이철수 사무국장, 오정수 연구관리본부장, 전진표 대외협력본부장, 한문영 기록관리본부장 등 한국산림정책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2016년 6월부터 산림녹화사업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활동을 시작했다. 세계적 자랑거리인 산림녹화사업을 이대로 잊히게 둘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들은 이후 7년간 주 3일씩 사무실에 출근해 아무런 대가 없는 재능기부로 기록유산 등재에 온 힘을 쏟았다. 이 교수는 “여생의 마지막 보람된 일이라 생각해 의기투합했다”고 밝혔다.
한국은 훈민정음,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새마을운동기록물 등 네번째로 많은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한 나라지만 연구회가 등재를 준비하고, 신청까지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0여년 전 산림청이 기록유산 도전 의사를 밝혔지만 남아있는 기록물이 거의 소실돼 무산된 바 있다. 산림청의 후원과 협조 아래 이 교수 등과 뜻을 같이하는 전국 30여명의 추진위원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7년간 1만여 건의 관련 기록물을 수집했다. 그 결과 지난 3일 제2차 세계기록유산 한국위원회의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oW) 등재 신청 대상으로 조건부 가결됐다. 2017년 1차 시도 후 ‘재수’ 끝에 찾아온 쾌거였다.
조건부로 가결된 산림녹화기록물은 내년 하반기까지 세계기록유산 한국위원회의 재검토 후, 2024년 하반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의 사전심사와 2025년 상반기 최종 심사 등을 거쳐 등재 여부가 정해진다. 이 교수는 “조건부 가결이라는 것은 기록물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세부내용을 수정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내년 사전심사까지 수집한 기록물 1만건 중 아직 데이터베이스(DB)에 반영하지 못한 기록물 600건 가량을 추가로 작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는 한국산림정책연구회 재능기부로 등재를 준비했지만, 이제는 산림청에서 주관해 예산을 투입하고, 보관시설을 만들어 최종심사를 준비해야 한다”며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성공사례인 산림녹화가 잊히지 않도록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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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진 기자 oh.y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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