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오류와 회피 걷어내면[책과 삶]
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276쪽 | 1만5000원
정원, 부영, 경애, 나(준희)가 떠난 강촌 여행. 정원이 강촌 숙소 주인에게 어디서 사슴벌레가 들어오느냐고 묻는다. 주인은 정원이 했던 말을 되받으며 답한다.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어디로든 들어와.”
정원과 준희는 ‘사슴벌레식 문답’을 주고받는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10년 뒤 정원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경애는 교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부영을 배신한다. 관계는 끊긴다. 정원의 20주기 추모 모임을 다녀온 뒤 준희는 답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부영과 경애에게 연락을 보낸다. 답하지 않는 경애, ‘잘 살라’는 문자만 보낸 부영.
준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과거 여행을 아름답게 채색하려 했다. 기억의 터널 끝에서 깨닫는다. 질문이 주는 불안과 모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인 줄 알았던 ‘사슴벌레식 문답’은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갇혔다는 표현이었다.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권여선이 3년 만에 소설집 <각각의 계절>을 펴냈다. 마지막 단편 ‘기억의 왈츠’도 교외의 숲속 식당을 찾아갔다가 30여년 전 마주한 ‘기억’을 떠올린 이야기다.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애매한 연애’였다고 기억해왔지만 인간의 오류와 회피를 걷어내고 나니 도망쳐왔던 ‘나’를 비로소 발견한다.
책의 제목 ‘각각의 계절’은 단편 ‘하늘 높이 아름답게’에서 병으로 죽은 마리아가 한 말이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미세하고 깊은 감정을 담은 문장들이 읽는 즐거움을 준다.
임지선 기자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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