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총 품고 물가와 전면전… 美 최고의 ‘인플레 파이터’
초긴축 통화정책으로 경제안정 이끈
前 美 연준의장 폴 볼커의 회고록
“밧줄 끝으로 미끄러져 가는 美경제
구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시작”
초고금리 정책 펼치며 살해 위협도
당시 상황 담백하고 진솔하게 묘사
‘물가 전쟁’ 최전선 고뇌 엿볼 수 있어
미스터 체어맨-폴 볼커 회고록/폴 볼커, 크리스틴 하퍼/남민호 옮김/글항아리/2만8000원
“저는 연준의 독립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밀러 의장이 유지해온 통화정책 기조보다 더 긴축적인 기조를 지지합니다.”
이란혁명 이후 잇따른 석유파동과 달러화 약세로 인해 물가가 1년 만에 무려 13%나 오르는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이 미국을 휩쓸던 1979년 7월의 일이었다. 그는 상원 청문회를 거쳐서 다음달 미 연준 의장에 취임했다. 이때 그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밧줄 끝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미국 경제를 구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업무를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바야흐로 인플레이션의 전쟁이 시작됐다.
금리를 인상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던 취임 열흘 뒤, 볼커는 곧바로 재할인율을 10.5%로 인상했다. 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살인적인 물가상승 탓에 긴축을 미룰 여유가 없었다. 9월 재할인율을 인상한 그는 10월 다시 재할인율을 무려 1%포인트나 인상해 12%로 올리는 한편, 은행의 지급준비금 적립 비율을 확대하고 투기적 대출을 중지시키면서 통화공급을 억제했다. 시중금리는 21.5%라는 최고 수준을 뛰었고, 주택담보대출 금리 역시 18%를 상회했다. 미국 금융 역사에서 금리가 가장 높은 시기였다.
물가를 잡기 위해서 금리를 올리고 통화 공급을 줄이면서 드라이브를 걸자, 불만과 저항도 커져갔다. 일부 농민들은 워싱턴으로 몰려와 연준 빌딩을 트랙터로 에워쌌고, 시민단체들은 여러 차례 연준 본부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심지어 무장한 남성은 연준 건물에 난입해 이사들을 인질로 삼으려 위협한 일까지 생겼다. 그는 1980년 12월 ‘개인 안전을 위한 호송 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경호가 붙었고, 스스로 몸에 권총을 지니고 다녀야 했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1982년 여름이 되자 물가상승률이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인플레이션이 뚜렷하게 하락 징후를 보이자, 그는 7월 재할인율을 내리면서 통화정책을 완화 기조로 전환했다. 미국 경제는 이후 건전성을 회복하면서 1990년대 찬란한 호황기를 맞았다. 볼커의 승리였다.
“최고의 인플레이션 파이터”, “권총을 품고 다니면서 물가와 맞선 사람”, “미스터 체어맨(의장님)” 등으로 불리며 1980년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성공적으로 제어해 최고의 연준 의장으로 불리는 폴 볼커의 회고록이 최근 번역 출간됐다.
그는 크게 당황했다. 마침 당시에는 긴축정책을 펼칠 계획이 없는 데다가 대통령이 연준에 명령을 내림으로써 분명한 월권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 나왔다고 회고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무엇를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말 한마디도 없이 걸어 나왔다.”(197쪽)
책은 1927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시 관리인이라는 지방정부 공직자 아들로 태어난 볼커가 1952년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활동한 이래 재무부 통화담당 차관,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연준 의장 등 30년 가까이 미국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한 과정과 이면을 담았다.
책에는 그가 뉴욕 연방준비은행 근무를 시작할 무렵부터 주목을 끌기 시작한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통화주의자에 대한 비판적 언급도 나온다. “통화공급의 최적 증가율을 산출하고 그 준칙을 어떤 상황에서도 고수하라는 통화정책에 대한 그의 조언은 가장 좋게 말한다 해도 순진했고, 위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64쪽)
마치 볼커의 성격을 보여주듯, 책은 구성이나 문장 모두 전혀 꾸밈이 없이 단백하다. 그러면서도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이나 연준 의장 당시 대통령들의 모습 등 내용은 진솔하다. 현대 통화시스템의 형성에 기여했던 한 비범한 인물의 자서전에 걸맞다. 세계 각국이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하는 지금,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들의 고민과 고독을 엿보고 싶다면 제격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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