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가다]원폭에 한인 3만 명 희생…“피폭도 숨기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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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정상은 다음 주 히로시마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하기로 했죠.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일본인 다음으로 많지만, 오랜 시간 아픔과 차별을 견뎌왔습니다.
원폭 피해자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세계를 가다 김민지 특파원입니다.
[기자]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순식간에 폐허가 된 히로시마.
현재는 평화기념공원이 들어섰고 중앙에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걸어서 2분 가량 떨어진 곳에 5m 높이의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가 보입니다.
히로시마 시의 반대로 공원 밖에 세워졌다가 1999년에야 공원 내부로 옮겨졌습니다.
반쯤 무너져버린 외벽과 앙상한 철골 구조가 보이는 히로시마 원폭 돔은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군수공장이 밀집해있던 히로시마에 미군이 원폭을 떨어뜨리면서 14만 명이 숨졌고 그 중 3만 명은 한국인이었습니다.
78년이 흘렀지만 아흔 살 박남주 할머니는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박남주 / 원폭 피해자·재일동포 2세]
"빛이 번쩍 하더니 엄청난 연기 덩어리와 불빛이 전차를 덮쳤고 엄청난 소리로 비명을 질렀어요. 모두 다쳐 피투성이였어요."
원폭 투하 지점에서 1.9km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엄청난 열기와 뜨겁다고 호소하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박남주 / 원폭 피해자·재일동포 2세]
"집 근처 둑에 올라가보니 히로시마가 사라져 있었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지옥을 본 적 없지만 지옥 그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한국인들이 많았습니다.
[박남주 / 원폭 피해자·재일동포 2세]
"일본인이 점점 병사로 차출되니까 한국인 강제 노동자들이 미쓰비시 조선소 등 군수 공장에서 일했고 (원폭 당시) 많이 숨졌죠."
피폭에서 살아남은 후의 삶도 녹록지 않았습니다.
피폭을 전염병처럼 생각해 피하고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치료받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권준오 / 민단 히로시마본부 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
"일본인들이 '(피폭이) 옮으니까 오지 마! 곁에 있지 마!'라고 했어요. 차별 받으니 다들 피폭 사실을 숨겼습니다."
소외됐던 한국인 원폭 희생자들을 위해 한일 정상이 함께 위령비를 찾는다는 건 그래서 더욱 의미가 큽니다.
[권준오]
"(기시다 총리가) 참배하는 것으로 사죄를 표한다고 생각합니다. (윤 대통령은) 피폭 실태를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 대통령은 지금까지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를 참배한 적이 없고, 일본은 1999년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가 참배한 적 있습니다.
히로시마에서 채널A뉴스 김민지입니다.
영상취재: 박용준
영상편집: 이승근
김민지 기자 mettymom@ichanne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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