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로 물든 신촌… ‘서울광장 퀴어축제 불허’ 규탄 행진 [밀착취재]

김나현 2023. 5. 1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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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기에 있다. 무지개는 이어진다.”

젊음과 활기로 가득찬 서울 신촌 대학가에 열띤 구호와 함께 여섯 빛깔 무지개가 등장했다. 12일 오전 11시 서울 신촌역 인근에서 ‘서울퀴어퍼레이드 서울광장 사용 불허 규탄 대학가 행진’이 개최됐다. 이날 행진은 서울대학교 학생‧소수자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경희대·고려대·동국대·숭실대·연세대·홍익대 등 서울 시내 10개 대학의 20개 단체가 공동주최했다.
서울퀴어퍼레이드 서울광장 사용 불허 규탄 대학가 행진 기획단이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해당 집회는 지난 3일 서울시가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조직위)의 서울광장 사용 신청을 불허하면서 촉발됐다. 4일 서울시에 따르면 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광장운영위)는 오는 6월30일∼7월1일 서울광장 사용을 같은 날 신청한 ‘서울퀴어문화축제’와 기독교단체 CTS문화재단의 ‘청소년·청년 회복 콘서트’ 2건을 심의한 결과, CTS문화재단 신청을 승인했다. 

두 단체는 행사 개최 90일 전인 지난달 3일 동시에 서울광장 사용을 신청했다. 이번 결정으로 2015년 이래 매년 서울광장서 열린 퀴어문화축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기 온라인으로 진행된 것을 제외하고, 올해 처음 서울광장에서 열리지 못하게 됐다.

◆“우리가 청년이다” 서울 10개 대학 구성원 모여 신촌 대학가 행진

이날 서울 10개 대학의 학생·소수자 인권위원회 및 성소수자 동아리 등은 신촌의 명물 ‘빨간 잠수경’ 앞에 모여 ‘서울퀴어문화퍼레이드(서울퀴퍼) 서울광장 사용 불허’ 규탄 발언을 이어갔다. 그들 위로 각 단체들의 깃발과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약 130명의 시민이 집회에 참석해 ‘누구의 회복이냐 우리가 청년이다’, ‘사용불허 웬말이냐 서울시는 각성하라’ 등이 적힌 피켓을 흔들며 지지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첫 발언에 나선 권소원 서울대학교 학생‧소수자 인권위원장은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한 서울시의 결정은 국가의 혐오를 여실히 드러낸 순간”이라며 “유구한 혐오의 논리이며 행정에마저 드리운 차별의 발악”이라고 주장했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를 따라 집회 참석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큐이즈’는 “매일매일 사회는 우리의 존재를 가시화하기를 거부한다”며 “퀴어문화축제는 동지들과 개방적인 공간에서 자긍심을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단 하루인데, 그 하루마저 서울시가 박탈했다”고 비판했다. 

홍익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홍반사’도 “우리는 우연찮게 이 세상에 태어나 우연찮게 부여받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해달라는 목소리도 도둑 맞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발언을 마친 참가자들은 “차별행정 규탄한다”는 구호를 외치고 현대백화점 신촌점 유플렉스입구부터 연세로를 따라 맥도날드 연세대점까지 왕복 400m 거리를 한차례 행진했다. 행진을 마치고 다시 한자리에 모인 참석자들은 걸그룹 소녀시대의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를 함께 부르며 집회를 마쳤다. 

“사랑해 널 이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서로를 보듬는 노랫말이 신촌 거리를 채웠다.

이날 행진에는 대학생부터 청소년, 직장인까지 다양한 사회구성원이 참여해 서울시 행정에 의문을 던졌다. 서울여성회 페미니스트대학생 연합동아리원이라고 밝힌 강나연(25), 이유진(22), 느룽지(활동명·23)씨는 “퀴어퍼레이드는 청년과 청소년들이 본인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인데, 이를 막으면서 청년과 청소년을 회복하겠다고 하니 서울시의 결정이 기만적으로 느껴진다”며 “올해 꼭 서울광장에서 하는 축제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무지개는 이어진다’라고 적힌 피켓을 든 집회 참석자가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를 따라 행진하고 있다.
명희수(27)씨는 “전국 각지의 퀴어들이 1년에 한번 광장에 모여 하는 축제는 소수자 당사자들에게 정말 중요한 가치를 갖는데, 이런 식으로 밀어내는 것은 서울시가 성소수자를 혐오해도 된다는 위험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홀로 행진에 참석한 이들도 있었다. 신모(19)씨는 “SNS를 통해 퀴어문화축제 (서울광장 사용) 불허 결정을 접하고 납득하기 어려워 왔다”며 “우리가 모인 이곳이 광장이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혐오에 맞서겠다”고 했다. 이모(22)씨는 “나는 성소수자 당사자는 아니지만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서울시 행정에 실망해서 오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광장 퀴어문화축제 ‘불허’…절차상 문제 있었나

서울시는 조례에 따라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제6조)’에 따르면 서울광장 사용일이 중복된 경우 신고 순위에 따라 수리한다. 만약 신고 순위가 같으면 신고자끼리 협의해 조정하고, 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광장운영위 의견을 들어 어느 행사를 개최할지 정한다. 

이때 △공익을 목적으로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행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집회 신고를 마친 행사 △공연과 전시회 등 문화·예술행사 △어린이·청소년 관련 행사 △그 밖에 공익적 행사가 선순위가 된다.
행진 참여자들이 ‘우리가 청년이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시에 따르면 두 단체가 같은 날 서울광장을 쓰겠다고 신청하면서 신고 순위가 같았기 때문에 시는 지난달 13일 양측에 일정을 조정할 의사가 있는지 유선상으로 물었다. 하지만 두 단체 모두 일정 변경이 어렵다고 답했고, 시는 이들 신청 건을 광장운영위에 상정했다. 이에 광장운영위는 CTS문화재단의 손을 들어주며, 청소년·청년 회복 콘서트가 어린이·청소년 관련 행사이기 때문에 선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직위 측은 서울시가 절차를 위반한 채 편향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반발했다. 조직위는 “조례에 따른 적법한 절차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며 “조정 시 보통 유선과 대면으로 모두 의사를 물어보는데 이번에는 전화로만 묻고 곧바로 광장운영위에 상정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의결에 참여하는 한 시의원은 광장운영위가 열리기 전부터 ‘청년 회복 콘서트가 열린다’고 인터뷰하기도 해 조직위 측에서는 부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서울광장 사용은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적법한 절차와 요건을 갖추면 사용료를 납부하고 서울시민 누구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중복신고 건에 대해서는 신고자들간 협의를 통해 조정돼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조율이 없이 광장운영위에 안건으로 상정됐다는 것이 조직위의 입장이다.

이날 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은 광장운영위가 밝힌 기준(어린이·청소년 관련 행사 우선 선정)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 소속이라고 밝힌 사과(활동명·24)씨와 상부(활동명·23)씨는 “퀴어문화축제도 어린이·청소년 행사”라며 “오히려 청소년·청년 성소수자들은 다른 집단보다 자살률도 높고, 정신건강 문제를 앓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서울광장 축제를 통해 정작 회복이 필요한 주체는 성소수자들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서울퀴퍼 서울광장 사용 불허 규탄 대학가 행진 참석자들이 반환점을 돌고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이 지난 3월 말 펴낸 ‘2022년 상담·위기지원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진행된 청소년 성소수자 상담 중 상위 3개 이슈는 △정신건강·심리문제, △진로/학업, △가족과의 갈등이었다. 

상담을 진행한 138명 대상 1471건의 상담이슈 분석 결과, 특히 성인기로 이행하는 10대 후반(17∼19세)의 경우 정신건강·심리문제(96건), 가족과의 갈등(72건)·탈가정(35건) 및 자해(22건)·자살위기(14건)가 두드러졌다.

조직위에 따르면 퀴어문화축제는 퀴어 청소년과 청년이 ‘진정한 나로 살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끝없이 고민하며,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는 현장이다. 양편의 주장이 조정 절차를 통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점은 확인이 필요한 지점이다. 조직위 관계자는 “그래도 7월 1일 서울퀴어퍼레이드는 반드시 열린다”며 “조직위는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겠다”고 말했다.

글·사진=김나현 기자 lapiz@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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