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뾰족한 자구책 없이 사장 사퇴 …'요금인상' 명분쌓기만
◆ 위기의 에너지 공기업 ◆
정승일 한국전력 사장이 결국 대규모 적자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취임 1년11개월 만에 물러났다. 여당이 "전기요금 인상 요구에 앞서 고강도 자구책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며 정 사장의 자진 사퇴까지 압박하자 결국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정 사장 사퇴와 한전의 추가 자구책 발표로 40일 이상 표류해온 올해 2분기 전기요금 인상 결정도 막바지 수순에 접어들었다.
12일 정 사장은 입장문을 내고 "전기요금과 관련해 국민에게 부담을 드려 매우 송구하고 이에 막중한 책임감을 절감한다"며 "오늘자로 한전 사장직을 내려놓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어 "당분간 한전 경영진을 중심으로 비상 경영체제를 운영한다"며 "국민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오늘 발표한 자구노력과 경영혁신을 차질 없이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정 사장은 전기요금 인상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전기요금 정상화는 한전 경영 정상화의 중요한 디딤돌"이라며 "요금 정상화가 지연되면 전력의 안정적인 공급에 차질이 발생하고 한전채 발행 증가에 따른 금융시장 왜곡, 에너지 산업 생태계 불안 등 국가 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이날 한전은 5조6000억원 이상의 추가 자구책을 마련했다. 전력설비 건설을 이연·조정하고 업무추진비 등 각종 비용을 절감하는 재무 개선 방안을 비롯해 정원 496명을 감축하고 임직원 임금 인상분과 성과급을 반납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서울 여의도 남서울본부를 매각하고 한전아트센터 등 10개 사옥을 임대하기로 했다.
정 사장 사퇴와 추가 자구책 마련은 그동안 여당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사안이다. 당정은 지난 3월 말 협의를 거쳐 전기요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지만, 인상 폭을 두고는 이견을 보여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한전 적자 해소를 위해 인상 폭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여당은 국민 부담을 이유로 인상 최소화를 요구했다. 계속되는 당정 협의 결과 한전을 비롯한 에너지 공기업의 추가 자구책은 올해 2분기 전기·가스 요금 인상의 전제조건이 됐다. 이에 따라 이날 한국가스공사도 1조4000억원 이상의 자구책을 발표하고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했다. 자구책에는 프로농구단 운영비를 20% 줄이고 임직원 임금 인상분과 성과급을 반납하는 등의 내용까지 담겼다.
다만 '에너지요금 정치화' 우려는 오히려 커지고 있다. 한전의 극심한 경영난을 해소하고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어 에너지요금을 향한 정치권 입김은 더 거세질 가능성이 크다. 일부 전문가는 이 같은 정치권 개입이 요금 구조를 오히려 왜곡한다고 지적한다.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요금 인상 요인이 충분히 발생했지만 여론 눈치만 보다 지금과 같은 결정을 내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관료 출신 정 사장에 대한 사퇴 요구 역시 희생양을 찾은 것이라는 시각마저 있다. 요금 추가 인상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온기운 에너지정책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 대표는 "정치가 에너지요금을 결정하는 데 개입하는 구조는 내년 총선 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요금 추가 인상으로) 윤석열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어떻게 달라질지가 관건"이라고 내다봤다. 아울러 요금 인상에 대한 '명분 쌓기용' 자구책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한전 자구책 마련이 불가피한 면이 있다"면서도 "적절한 요금 인상이 전제되지 않은 고강도 자구책은 오히려 기업과 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독이 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독립적인 요금체계가 확립되지 않는 한 미봉책에 그친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정부는 에너지요금 결정체계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지난 9일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추진 중인 에너지 가격 결정 방식 연구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전기·가스 요금 결정체계를 수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광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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