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미래] 탐욕과 절제

2023. 5. 1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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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탈리아로 향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오…." 베르길리우스의 로마 건국 서사시 '아이네이스'(도서출판 숲 펴냄)에 나오는 말이다. 로마를 건국한 영웅 아이네이아스가 연인인 카르타고 여왕 디도에게 남긴 유명한 이별 선언이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 출신이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불태웠을 때 아이네이아스는 유민을 이끌고 정처 없이 유랑을 떠난다. 그의 가슴엔 두 번째 트로이를 세우라는 신의 소명만이 가득하다. 천신만고 끝에 카르타고에 도착한 그는 디도 여왕의 환대 속에서 세력을 정비한다.

당시 카르타고 역시 위기였다. 아프리카 강국들이 도시를 위협하고, 디도와 결혼해 나라를 삼키려는 이들이 가득했다. 아이네이아스에게 한눈에 반한 디도는 그와 결혼해 사랑을 성취하고, 트로이 유민을 받아 신이 약속한 두 번째 트로이를 카르타고에 세우리라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러나 사적 욕망과 공적 이익을 함께 이루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로마 현자들은 과도함이 인간 눈을 멀게 해 비극을 가져온다는 걸 끝없이 경고했다. 공익을 내세워 사욕을 충족하려는 디도의 탐욕은 균형 외교에 의존하던 카르타고를 위기에 빠뜨리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원인이 된다.

아이네이아스는 달랐다. 사적 사랑과 공적 소명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는 눈물 속에 사랑을 포기한다. "내 선택에 따라 인생을 사는 것을 운명이 허용한다면 내 첫 번째 관심사는 살아 있는 동포들을 돌보는 일이오." 이어서 그는 카르타고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덧댄다. "신께서는 나더러 이탈리아를 차지하라고 명령하셨소. 그곳이 내 사랑이고 내 조국이오." 지도자의 행동 원리는 공적 가치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더욱이 아이네이아스는 사랑을 모르는 냉혈한이 아니다. "내가 이탈리아로 향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오"라는 이별 선언은 그의 가슴에 소용돌이치는 번민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탈리아로'는 아이네이아스의 공적 소명을, '향해 가다'는 아이네이아스의 결단을, '내 뜻이 아니오'는 사랑하지만 떠나야 하는 아이네이아스의 절절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 구절이 명구로 칭송받는 이유다.

디도의 탐욕과 아이네이아스의 절제란 설정은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카르타고와 로마의 오랜 쟁투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 일화는 사익과 공익이 충돌할 때 지도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한 국회의원의 코인 투자 솜씨로 세상이 시끄럽다. 돈과 명예를 함께 얻는 길은 부패 말고는 불가능하다. 제척을 모르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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