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취업규칙 새 판례, ‘윤석열 노동개혁’에도 영향

이혜리·김지환 기자 2023. 5. 1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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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9일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안에 반대하는 민조노총 조합원들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바꿀 때 반드시 노동자의 ‘집단적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지난 11일 판결은 윤석열 정부가 추진 중인 노동개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노동조건 결정에 있어서 ‘노사 대등의 원칙’을 재확인한 만큼 정부가 이에 어긋난 제도 개선을 추진할 경우 논란이 일 수 있다.

1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현대자동차 간부사원 취업규칙 사건 판결문을 보면, 대법원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대한 노동자의 집단적 동의권에 대해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강화해 그들의 기본적 생활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이라고 명시했다. 대법원은 “취업규칙의 내용에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 변경 때)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 것은 취업규칙의 본질적 기능과, 필수적으로 확보돼야 하는 절차적 정당성의 요청을 도외시하는 것”이라며 기존 판례를 폐기하는 이유를 밝혔다.

대법원은 1977년부터 집단적 동의권 법리를 확립했었다는 점을 짚었다. 1989년 근로기준법에 집단적 동의권이 명문화되기 전이다. 대법원은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권은 명문의 규정이 없더라도 근로조건의 노사 대등 결정 원칙과 근로자의 권익 보장에 관한 근로기준법의 근본정신, 기득권 보호의 원칙으로부터 도출된다”며 “이러한 집단적 동의는 단순히 요식적으로 거쳐야 하는 절차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 (취업규칙의) 유효요건”이라고 했다.

이흥구·오경미 대법관은 보충의견을 통해 새 판례가 바람직한 노사관계 정립에 기여한다고 설파했다. 두 대법관은 “사용자가 시간과 노력을 더 들여서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를 통해 평화로운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사후적으로 갈등과 법적 분쟁을 거치는 것보다 노사 당사자와 사회 전체의 비용 지출, 불안정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노동자의 집단적 동의권을 형해화하는 방향의 노동개혁 정책에는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박근혜 정부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을 완화하는 행정지침을 시행한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지침은 연공급에서 직무·성과급 중심으로의 임금체계 개편 등은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기 때문에 취업규칙 변경 때 노동자의 집단적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규정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집권 뒤 이 지침을 폐기했다.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부 교수는 “박근혜 정부는 임금피크제 확산을 위해 노동자 동의를 받지 않은 취업규칙 변경도 사회통념상 합리적이면 된다는 논리를 들었는데 이제 당시와 같은 방식으로 지침을 만드는 것이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경영계는 여전히 취업규칙 변경 요건을 집단적 동의에서 노사 협의로 바꾸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 과반수 이상의 동의 없이 협의 절차를 거치는 것만으로도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지난 11일 오후 전원합의체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자리에 앉아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는 박근혜 정부와 달리 접근하고 있기는 하다. 노동개혁 밑그림을 그린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지난해 12월 “임금체계에 직무·직종·직군의 다양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취업규칙 변경의 동의 주체 범위를 명확히 하는 등 법·제도적 개선방안을 모색할 것”을 고용노동부에 권고했다. 특정 직무·직종·직군의 임금체계 개편을 위해 취업규칙을 변경할 때 해당 직무·직종·직군 노동자의 동의만 받아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양대노총은 “과반 노조나 근로자대표의 교섭력과 합의권이 무력화된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이번 대법원 사건에서 원고들은 간부사원에게만 적용되는 취업규칙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 자신들이 노조 조합원은 아니지만 노조와 회사가 체결한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는다면서 이보다 불리한 취업규칙은 무효라는 주장도 했다. 원심 재판부는 노동의 조건·형태·직종 등 특수성에 따라 노동자 일부에 적용되는 별도의 취업규칙을 작성할 수 있고, 간부사원은 단체협약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원고들 주장을 배척했는데 대법원도 같은 판단이었다.

다만 대법원은 간부사원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에 대한 집단적 동의의 주체는 변경 당시 간부사원뿐 아니라 장래 간부사원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있는 일반직·연구직·생산직 등의 직원들까지 포함한 노동자 집단이라고 판단했다. 취업규칙 변경 시점에는 어느 특정 직무·직종·직군만 영향을 받더라도 향후 다른 집단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면 이 집단까지 포함해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취지다.

남은 불씨는 대법원이 노동자 측의 집단적 동의권 ‘남용’ 여부를 별도로 따져보라고 한 것이다. 회사가 노동자의 집단적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취업규칙 변경을 강행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에선 과반 노조나 근로자대표가 특정 직무·직종·직군의 취업규칙 변경에 동의하지 않는 사례를 사용자가 ‘집단적 동의권 남용’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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