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의 사진들[김창길의 사진공책]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스스로 세상을 떠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소설 <인간 실격>은 세 장의 인물 사진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년 시절, 학창 시절, 그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질 무렵의 모습이 담긴 주인공 ‘요조’의 사진이다. 유년의 사진은 웃고 있다. 얼핏 귀여운 도련님같이 보이는 사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섬뜩하다. 애당초 요조는 웃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바로 그 증거다. 사람이란 주먹을 쥔 채 웃을 수는 없는 법이다. 억지웃음이라고나 할까. 웃는 소년의 얼굴 근육은 잔뜩 구겨져 있을 뿐이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유년의 요조는 자기를 괴물처럼 느꼈다. 좀처럼 먹지 않는 괴물. 식구들은 식사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겁박했다. 하지만 소년은 공복감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정작 소년이 겁을 먹은 것은 자기의 생사가 아니라 타인의 얼굴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얼굴에 드러냈다. 풀밭에 누워 잠을 자던 소가 자기 배에 앉은 벌레를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꼬리로 후려쳐 죽이듯, 인간이라는 존재는 갑자기 야수성을 드러냈다. 공포에 휩싸인 소년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인간들처럼 보일까? 소년은 마스크를 생각했다. 조커처럼 웃고 있는 마스크. 요조는 주먹을 꽉 쥐고 자기 내면을 숨겼다. 그리고 쭈글쭈글한 미소를 짓는 마스크를 썼다.
인간의 조건은 사진에 찍힐 수 있을까? ‘엘리펀트 맨’으로 불렸던 영국인 조셉 메릭(1862~1890)의 모습은 다자이 오사무가 묘사한 것과는 정반대로 사진에 찍혀 있다. 메릭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도 없는 괴물이다. 그는 신체 특정 부분이 과잉 성장하는 프로테우스 증후군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로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둔갑술에 능통한 신. 하지만 메릭의 둔갑술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에 재앙이었다. 19세기 말의 의사들은 그를 치료하기는커녕 진단도 내리지 못했다. 서른을 넘기지 못한 나이에 메릭은 사람으로 변신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지금 보고 있는 엘리펀트 맨의 사진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889년 병원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유명 인사들이 대중에게 배포했던 명함판 형식 사진이다. 사진 속 메릭은 엘리펀트 맨이라는 별명과는 달리 코가 그다지 크지도 길지도 않다. 그러나 메릭은 “내 머리둘레는 36인치요, 뒤에는 큰 커피잔만 한 거대한 살덩어리가 있고, 다른 쪽은 마치 산과 골짜기가 뭉쳐져 있는 것 같으며, 얼굴은 그야말로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라며 자신을 코끼리에 비유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의 얼굴은 코끼리보다는 양을 닮은 것 같다. 그런데 왜 메릭은 자신을 코끼리 같다고 소개했을까?
가족에게 버림받고, 구빈원에서도 퇴출당한 메릭은 돈벌이가 필요했다. 그가 작성했다고 추정되는 자기소개 글은 기괴한 모습의 인간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돈을 버는 프릭쇼의 홍보 팸플릿에 소개된 내용이다. 메릭의 짧은 생애를 담은 팸플릿이다. 그가 괴물이 된 사연을 설명한 부분이 흥미롭다. 자기를 임신한 어머니가 우연히 마주친 코끼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꽤 잘 먹히는 레퍼토리였다. 지능이나 심성을 두개골이나 얼굴 모양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골상학과 인상학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던 시대였다.
서커스의 시대이기도 했다. 칼과 불을 집어삼키고, 쇠사슬을 이빨로 끊어트리는 인간의 괴력뿐만 아니라 기이한 인간의 외양 또한 돈이 되는 구경거리였다. 개의 얼굴을 한 소년 조조, 태국 샴쌍둥이 창과 엥, 수염 난 여인 애니 존스, 네 발 달린 머틀 코빈 등 ‘프릭(freak·괴물 같은 사람)’은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프릭쇼는 물론 그들을 찍은 사진도 수입원이 됐다. 미국 뉴욕의 찰스 아이젠만은 이들의 명함판 사진을 찍는 사진사였다. 사진을 찍는 프릭도 있었다. 양팔이 없는 찰스 B 트립이다. 그는 두 발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며 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트립은 다른 프릭들과는 결이 달랐다. 신체적 결함이 있는 것은 같았지만, 그는 말쑥한 백인 남성이었다. 서열이 있는 인종의 개념은 그를 프릭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범주에 포함시켰다. 반면 신체는 멀쩡하지만 열등한 인종으로 여겼던 인디언은 박람회에 산 채로 전시됐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조선인도 박람회장에 전시됐다는 기록이 있다.
어떠한 범주의 인간들이 실격 판정을 받고, 프릭으로 내몰리는 것일까? <괴물성: 시각 문화에서의 인간 괴물>(범고래출판)을 쓴 디지털 미디어 작가 알렉사 라이트는 “‘프릭’ 또는 ‘괴물’이라는 꼬리표는 반드시 특정 유형의 생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네 발 달린 머틀 코빈은 우리가 정상이라 생각하는 표준을 넘어서는 ‘과잉’의 상태가 차이를 만든다. 샴쌍둥이와 수염 난 소녀는 경계를 흐리게 한다. 둘도 아닌 하나, 남자도 아닌 여자는 혼란을 야기한다. ‘결핍’도 괴물을 만들어 낸다. 사진 찍는 프릭 찰스 B 트립은 양팔이 결핍된 존재다. 그런데 왜 유독 찰스 B 트립을 찍은 명함판 사진은 인간 이하로 보이지 않고 당당해 보일까? 그가 백인 남성이라는 이유로 전부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의사이면서 철학자인 조르주 캉길렘은 “현대의 과학적인 사고가 신체적 기형을 명명하고 분류하고, 그것의 원인을 설명함으로써 투명화했다”며 괴물성의 소멸을 이야기했다. 당시의 의학은 양팔이 없는 신체 결핍 상태를 ‘장애’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는 도달했다. 전쟁에서 팔과 다리를 잃은 애국자들을 프릭으로 내몰 수는 없는 시대였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엘리펀트 맨을 둘러싼 이야기는 영화화될 정도로 다소 낭만적이다. 의사 프레데릭 트레비스는 프릭쇼로 연명하는 엘리펀트 맨을 병원으로 데려오고, 런던 병리학회에 소개했다. 엘리펀트 맨의 괴물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의사들은 벌거벗은 그를 그저 구경할 따름이었다. 극장에서나 병원에서나 구경거리였던 엘리펀트 맨. 병원을 뛰쳐나와 다시 프릭으로 떠돌던 메릭은 온갖 고초를 겪고 다시 의사 프레데릭 트레비스와 재회한다. 런던 병원의 관계자들은 신문사에 편지를 썼다. 끔찍한 외모를 지녔지만 심성은 어린아이처럼 착하고 불쌍한 존재를 알려 재정적 협찬을 얻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행동이나 내면에서 괴물성을 찾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철학자 미셀 푸코의 진단은 적절해 보이는 대목이다. 웨일스의 알렉산드리아 공주는 길들여진 괴물을 구경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엘리펀트 맨은 감사 표시로 자기 모습이 담긴 명함판 사진을 선물로 건넸다.
엘리펀트 맨은 편안하게 누워서 잘 수 없었다. 거대해진 그의 머리 때문. 팔을 모아 웅크린 다리 무릎 사이에 자신의 머리를 고정시키지 않는다면 목뼈가 부러져 나갈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의 마지막을 발견한 이는 엘리펀트 맨이 누워 있었다고 전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자살이었다고 그를 애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쨌든 당시의 의술은 메릭을 구하지 못했다. 부모가 겪은 어떤 사건이 그를 반인반수가 되게 했다는 믿음은 그래서 신화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다. 포세이돈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모로부터 저주받아 태어난 크레타 왕국의 반인반우(半人半牛) ‘미노타우로스’처럼 말이다.
괴물성을 외양이 아닌 내면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엘리펀트 맨의 프릭쇼가 열린 극장이 있던 화이트채플에서 5명의 매춘부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수사는 진척이 없었다. 편지 한 통이 언론사에 도착했다. 보낸 이의 이름은 ‘잭 더 리퍼’. 연쇄살인을 한 당사자가 자신이라는 사연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이 편지를 거짓으로 일축했다. 범인이 1명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신문들은 살인마 잭 더 리퍼의 이야기를 경쟁적으로 다루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상상의 ‘살인마 잭’의 얼굴은 그림으로 그려져 지면에 실렸다. 당시 신문들은 삽화를 넣어야 잘 팔렸기 때문이다. 몇십년 후 요크셔 지방에서 또다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잭 더 리퍼의 존재를 부정했던 런던 경찰은 요크셔 연쇄살인 사건을 살인마 잭이 환생한 것처럼 수사했다. 상상의 살인마 잭 더 리퍼는 다큐멘터리로, 책으로, 연극으로, 그리고 영화로 계속 살아남는다.
현대의 괴물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떤지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살인사건이다. 교양인을 자처하는 현대인들은 살인 행위를 반인륜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범죄자의 생김새를 문제 삼을 수는 없는 처지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교양인으로서의 품격을 스스로 저버리면서 신상공개라는 카드를 종종 꺼내든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그러하다. 강남 납치 살인사건 용의자의 신상이 공개됐다. 한 국회의원은 ‘음주살인 운전자 신상공개법’을 발의하겠다고 기자회견을 열였다. ‘인면수심’이라는 한자성어는 ‘수심’이 아니라 ‘인면’에만 방점을 찍고 있는 듯하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프릭쇼가 사라진 현대를 사는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현대화된 프릭쇼를 구경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피의자 신상공개 특례법은 2010년 제정됐다. 강호순 연쇄살인 사건이 계기였다.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라는 여론 때문이다. 피의자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나이 등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까? 알렉사 라이트가 소개한 1970년대 미국의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의 이야기는 신상공개 효과에 대해 머리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그는 30명이 넘는 여성을 살해한 백인 남성이다. 미디어를 통해 공개된 테드 번디는 스캔들을 일으켰다. 범죄자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말끔하고 잘생긴 외모 때문이다. 일부 여성들은 그를 흠모했고, 테드 번디는 교도소에서 결혼까지 했다.
우리는 왜 흉악범의 낯짝을 확인하려 들까? 다자이 오사무가 얘기한 것처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 실격의 요소들이나 괴기성을 확인할 수 있어서?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범죄 없는 세상에 살 수 있을 것이다. 신분증에 붙은 증명사진이 괴기성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증명사진의 기원이라 볼 수 있는 ‘머그(낯짝)샷’이 포함된 19세기 파리 경시청 알퐁스 베르티옹의 범죄자 인체 식별법은 폐기됐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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