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역사가 빚은 풍미, 몰도바 와인에 반하다[주식(酒食)탐구생활⑬]
“우리 앞에 있는 와인은 저마다의 풍경을 갖고 있다”는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의 말은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 자주 인용된다. 와인의 본질과 매력의 핵심을 담고 있어서다. 포도밭이 있는 지역의 특성과 환경이 어떤지, 어떤 품종이 자라는지, 포도를 가꾸고 와인을 빚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그에 따른 개성과 차별화된 맛을 드러낸다. 다양성이 펼치는 매력이 와인의 미덕이기 때문일 터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와인은 특정한 지역의 풍경에 국한되어 있는 편이다. 와인 산지 하면 주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의외로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와인 생산국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오랜 양조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좋은 품질에 합리적인 가격까지 갖춰 최근 몇년 새 국내 애호가들 사이에 ‘발견’된 나라가 있다. 동유럽의 소국 몰도바다.
인도양의 휴양지 몰디브로 착각하거나, 그도 아니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일 수도 있을 만큼 낯설고 생소한 나라다. 하지만 와인 시장에선 다르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와인 수입량은 전년에 비해 주춤했다. 중량 기준으로는 전년에 비해 줄었고, 금액기준으로는 3.8%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반면 몰도바 와인은 중량 기준으로 31.8%, 금액 기준으로는 40.1% 증가했다. 지난 4월 초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렸던 주류박람회 ‘드링크 서울 2023’ 행사장에서도 몰도바 와인 부스에는 눈 밝은 애호가들이 일찌감치 몰려드는 바람에 시음 물량이 금세 동났다. 이날 선보였던 와인은 몰도바에서 가장 유명한 와이너리인 푸카리(Purcari)에서 생산한 ‘프리덤 블렌드’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이었던 몰도바, 우크라이나, 조지아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아, 세 나라의 토착 품종을 섞어 만들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이 와인은 수익금을 난민 기금에 사용하면서 세계적으로 많은 화제가 됐고, 와이너리 푸카리는 실제로도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와이너리의 많은 시설을 숙박처로 제공했다. 미담의 주인공이기에 앞서, 프리덤 블렌드는 여러 국제대회에서도 금메달을 수상하며 품질을 증명받았다.
인구 350만명 채 안되는 몰도바 유럽의 최빈국이지만 와인강국
푸카리 와인 영국 왕실에 납품, 푸틴의 ‘최애’ 와인으로도 유명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을 읽은 독자라면 몰도바의 푸카리를 떠올릴지 모른다. 책에선 푸카리가 생산한 와인을 두고 “영국 왕실에서 사랑하는 몰도바 공화국의 숨은 명주”라고 소개했는데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 시절부터 영국 왕실에 납품되어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에도 공식주로 사용됐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도 즐겨 마셨고,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가장 좋아하는 와인으로도 유명하다. 2013년 푸틴이 방한했을 당시 행사주로 올랐으며, 2014년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에선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VIP를 대접하는 만찬 식탁에도 이 와인이 있었다. 2010년부터 푸카리 와인을 국내에 수입해 온 차르와인 이수호 대표는 “초창기엔 몰디브에서도 와인을 만드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몰도바 와인에 대한 인지도가 없었지만 최근 시장의 반응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프리덤 블렌드 외에도 네그루 드 푸카리, 피노누아 드 푸카리가 대표적인 제품이다.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서쪽으로는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몰도바는 남한 면적의 3분의 1정도 되는 작은 나라다. 인구는 350만명이 채 안 된다. 유럽에서도 최빈국에 속하는 이 나라의 주요 산업은 와인이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 사람들이 마시는 와인 2병 중 1병이 몰도바에서 생산될 정도였다. 당시엔 품질보다 양에 치중하는 바람에 한동안 품질이 떨어졌으나 독립 후 생존을 위한 노력을 쏟으며 과거의 명성을 회복했다. 매년 10월 첫 주말을 ‘내셔널 와인 데이’로 국가가 지정했을 정도이니 몰도바가 국가적으로 와인에 쏟는 정성을 짐작할 만하다. 국제와인기구(OIV)에 따르면 현재 세계 20위 정도의 와인 생산국이다.
푸카리 외에도 몰도바에는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와이너리가 꽤 있다. 크리코바(Cricova)와 밀레스티 미치(Milestii Mici)는 지하 동굴 와인 셀러 길이가 각각 80㎞, 55㎞로 세계 1, 2위를 차지한다. 밀레스티 미치에서 보관하는 와인은 150만병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몰도바 최고의 관광명소이기도 한 크리코바 와이너리에는 2차 대전 때 나치의 헤르만 괴링이 약탈했던 와인을 비롯해 러시아 푸틴 대통령, 독일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와인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밀레스티 미치는 작가 정여울이 쓴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에 소개된 와이너리이기도 하다. 두 와이너리 지하 셀러에서는 매년 10㎞ 단축 마라톤도 열린다고 한다. 카스텔 미미(Castel Mimi)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와이너리 15개 중에 하나로 선정된 곳이다. 현재에는 국내에서 여러 수입사들이 몰도바의 다양한 와인들을 수입하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몰도바와인 한국어 홈페이지(wineofmoldova.co.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55㎞ 길이 동굴 ‘밀레스티 미치’ 와인 150만병 보관 기네스북 등재
크리코바는 몰도바 최고 관광명소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 입소문 지난해 국내수입액 40% 껑충
이 홈페이지를 만든 이는 아시아와인트로피 아시아 디렉터이자 와인마케팅 전문회사 디렉스인터내셔날을 운영하는 박찬준 대표다. 국제 와인 품평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는 그는 자타공인 몰도바 와인 전도사로 통한다. 국제와인기구가 공인한 유일한 아시아지역 와인 품평대회인 대전 아시아와인트로피를 비롯해 다양한 국제 행사에 몰도바가 적극 참여하면서 인연이 이어졌다. 그는 국내에 생소하던 몰도바 와인 정보를 모아 2020년에는 <몰도바 와인>이라는 책을 냈고 이듬해에는 홈페이지도 개설했다. 동유럽 와인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그는 “몰도바를 비롯해 조지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지역은 국제 시장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 고유의 기술과 토착 품종을 갖고 독창적인 와인을 만들어 내는 잠재력이 있는 나라들”이라며 “동유럽 와인을 통해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지아나 루마니아 와인도 소량이긴 하나 국내에 수입되고 있다. 와인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조지아는 800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갖고 있다.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이 사랑했던 와인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크베브리(Qvevri)라고 하는 토기에 담아 숙성시키는 고유의 방식으로 양조해왔다. 이 방식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현재도 이 같은 전통방식으로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 많지만 보다 많은 양은 스테인리스 스틸 통을 사용하는 ‘유럽식 양조법’으로 생산한다. 크베브리만으로 세계 20위권인 연간 와인 생산량을 충당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크베브리에서 숙성시킨 와인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편이며 와인 라벨에 크베브리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루마니아도 연간 와인 생산량이 세계 13위 정도인 데다 6000년의 와인 역사를 가졌다. 몰도바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연방 시절 소련의 와인 대량생산 기지로 활용되었던 터라 한동안 싸구려 와인이라는 오명에 시달렸으나 현재는 유럽과 미국에서 잠재력 있는 와인 생산국으로 주목받고 있다. 불가리아는 세계 와인 시장에서 서유럽 지역 와인 트레이더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생산지다. 보르도 스타일로 와인을 만드는 데다 가격 경쟁력도 뛰어나 보르도 와인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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