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압적인 부모에게서 벗어날 자유···결코 배은망덕한 일이 아니다[안주연의 래빗홀]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023. 5. 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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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에 질린 어린이의 모습. 출처 언스플래시

감정이 서툰 어른들 때문에 아팠던 당신을 위한 책

린지 C 깁슨 지음·박선령 옮김|지식 너머|336쪽|1만4000원

두 번째 래빗홀에 <게으르다는 착각>을 소개하면서, 사회심리학 교수이면서 본인의 정서적 고통과 차별의 경험을 공유하는 저자 데번 프라이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프라이스는 어린 시절의 정서적 학대, 학위과정에서의 소진에 따른 스트레스가 심했고 여러 가지 정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차례 시도 끝에 잘 맞는 상담가를 찾아 상담을 지속하며 안정되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칼럼 “치료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How to Get the Most Out of Therapy)”을 잡지 ‘Psychology Today’에 발표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치료자를 까다롭게 찾아라, 못난 모습을 보여라, 조언이 형편없을 때 치료자에게 알리자 등의 구체적인 지침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나 상담치료에 관심이 있거나, 효과적으로 치료를 진행하고 싶은 분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다루며 치료자의 관점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프라이스는 <감정이 서툰 어른들 때문에 아팠던 당신을 위한 책>을 읽으며 “독서로 보완요법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독서를 통해 어린 시절의 정서적 학대와 그것이 성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았고, 본인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이 책은 제가 소개할 후보 책꽂이에 꽂아두었었기에, 기쁘고 자연스럽게 다섯 번째 래빗홀로 가지고 가보려 합니다.

저는 프라이스의 칼럼이 책 <게으르다는 착각>의 주장과 연결된다고 느꼈습니다. 이 책은 사회의 과로 압력에 대항하는 무기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 어린 호기심과 친절이라는 주장을 담았습니다. 본인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무리할 때, 우리는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을 통해 건강과 생명력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진료실에서 어린 분부터 나이든 분까지의 솔직한 바람을 듣게 되는데요, 그 내용은 놀랍도록 비슷해요. 우리는 자신의 생긴 모습대로 표현하고, 발전하고 싶어 합니다. 이런 자신을 남들이 알아주고, 지지해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필요를 충족하여 번성하려는 자아 확립은 개체 발달에 필수적인데, 왜 우리는 진정한 자아와 멀어져 있을까요.

여기 몇 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독립한 집에 예고도 없이 들어오기에 미리 전화해달라고 하자, 화를 내며 ‘나는 부모니까 언제든 너의 집에 들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은 본인의 사회적 역할에 근거해 어떤 대우를 요구하는 ‘역할 특권’을 행사한 것이지요. 내가 원하니 자식인 너는 어떤 역할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역할 강압’도 자주 등장하는데요. ‘너는 부모가 부끄러워할 만한 옷차림을 하는’ 혹은 ‘원하는 손주를 낳아주지 않는 자랑스럽지 못한’ 자식이라는 메시지를 주며 수치심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것입니다. 게다가 정서적으로 미숙한 부모는 ‘감정 전염’을 통해 소통합니다. 감정적 요구를 말로 전하는 대신 울거나, 짜증내거나, 문을 쾅 닫거나,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주변이 압박을 느끼고 무슨 일이든 해주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또한 이들에게 있어 모든 상호작용은 결국 자기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나쁜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자녀가 사소한 불평이나 제안만 해도 ‘그럼 내가 세상에서 제일 나쁜 부모겠구나!’ ‘그래, 다 내 잘못이지!’처럼 극단적인 말로 응수합니다.

모든 문제가 어린 시절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누구에게나 있는 정서적으로 미숙한 모습을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통해 사회와 조율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장면들을 경험하면서 자란 우리에게 남겨진 어린 시절의 상처와 ‘역할 자아’의 강력함에 대해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사회는 식민지배, 전쟁, 독재정권과 압축성장까지 파란만장한 시기를 거쳐왔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변화 속에서 삶과 가족을 이어가야 했던 윗세대 조부모, 부모 세대는 트라우마를 여러 번 경험했고, 취약성을 드러내고 정서적 친밀감을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하여 유교 문화권에서 강조하는 질서, 자기 역할을 다 하는 미덕, 효 사상하에서 개인의 고유성과 정서는 뒤로 밀리기 쉬웠을 거예요. 이런 상황에 오래 노출되면 자신의 진짜 감정이나 욕구를 느끼기 어렵고, 삶의 정수가 되는 기쁨과 재미, 친밀감을 적극적으로 찾지 못하는 상황까지 갈 수 있습니다.

저는 감정적으로 힘들게 하는 부모나 가족과는 관계를 끊거나, 관여하지 말고 관리만 하는 방법을 택하라는 저자의 단호한 주장이 한국 사회의 균형을 잡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인으로서 부모에게 감사하고 존경하되, 부모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 감정적 한계를 인정하며 자신의 의견을 갖는 것은 배은망덕한 일이 아닙니다.

책에서는 낡은 역할 자아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내면화된 사회와 부모의 목소리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진짜 생각과 감정을 가질 자유, 인간적으로 불완전하게 살아갈 자유, 가족에 대한 과도한 공감에서 벗어날 자유, 한계를 정하고 얼마나 내줄지 선택할 자유, 자신을 표현할 자유…. “역할과 환상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기분”을 꼭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홀가분하지 않으신가요.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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