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탕한 암사자, 폭압의 여왕 미어캣···다윈의 고정관념 부수는 ‘암컷들’[책과 삶]
19세기 진화생물학에 반기
음탕하고 포악한 암사자
출산하는 수컷 해마 등 기록
편견을 전복한 동물의 세계
암컷들
루시 쿡 지음·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496쪽 | 2만2000원
인간 남성의 외도를 설명하는 데 ‘본능’이라는 단어가 동원되곤 한다. 1979년 잡지 ‘플레이보이’는 “남자는 움직이는 것이면 무엇과도 하려고 들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사회생물학이 그 이유를 말해줄 것”이라며 “진짜 악마는 당신의 DNA에 있다”고 말하는 심층 기사를 실었다. 정자는 크기가 작고 양이 많지만 난자는 크고 수가 제한된다는 데까지 가닿는 이 논리는 남성의 ‘난잡함’과 여성의 ‘조신함’이 수컷의 활력과 암컷의 수동성이라는 동물계의 짝짓기 전략을 닮았다고 성토했다. 어떤 이들은 생물학을 고정된 성역할은 물론 강간과 가정폭력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이용했다.
인간의 뇌는 깔끔한 이분법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길 선호한다. 생물학은 오랜 시간 남성과 여성, 수컷과 암컷이라는 군더더기 없는 이분법적 분류를 사용해 동물의 몸과 행동을 인간의 고정관념에 맞게 해석했다. ‘군더더기’들은 예외 취급했다. 찰스 다윈을 비롯한 과거 진화생물학자들은 암컷을 제대로 발육이 이뤄지지 않은 성, 몸집이 작고 약하며 대체로 색깔이 덜 화려한 성으로 보았다. 수컷은 암컷보다 형태가 복잡하고 다양하며 정신적 능력까지 뛰어난 개체로 여겼다. 암컷은 수컷의 정자를 재생산하는 통로일 뿐, 진화를 주도하는 것은 수컷이라 믿었다. 다윈은 이를 인간에도 적용해 “궁극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해졌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기에 이른다.
진화생물학의 뿌리박힌 편견은 최근 과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반박되고 있다. 암수가 서로에게 충실하다고 믿고 “바위종다리처럼 살아라”라고 1853년에 말한 목사 프레더릭 모리스는 사실 여성 신자에게 “밖으로 나가 연인을 찾고 두 마리 수컷과 250회 이상 짝짓기 하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생물학자들이 제대로 관찰을 수행하고 거기서 나타난 흐름을 제대로 포착했다면 목사의 잘못된 인용은 없었을 것이다. 암새의 90%가 일상적으로 수컷 다수와 교미한다는 것은 최근 생물학에서 주지의 사실이 됐다. 왜 과거 생물학자들은 이를 읽어내지 못했을까. 19세기 진화생물학의 도약을 이뤄낸 학자들은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 남성들로, 가부장적이던 당시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아버지, 남편, 오빠나 남동생, 혹은 아들에게 귀속된 존재였으며 가정을 지키고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을 가진 존재였다.
첨단 과학기술과 풍부한 야생 탐사에 기반한 과학적 사고로 무장한 최근의 학자들은 과거 생물학자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느라 “불편한 것들은 모조리 카펫 밑에 쓸어 넣고 덮어버렸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있다. 책 <암컷들>은 카펫 밑을 들여다본 학자들을 만나 자연계 암컷에 대한 풍성하고 생생한 초상을 제시한다. 폭력적인 암컷 미어캣, 레즈비언 앨버트로스, 타고난 모성애가 없어 보이는 암컷 개코원숭이 등의 모습을 기록하며 기존의 논리를 전복한다.
책의 원제는 ‘Bitch’(비치)다. ‘암캐’ 혹은 ‘나쁜 년’ 등으로 번역돼온 단어다. 여성을 얕잡아 이르는 욕설이지만 최근에는 똑똑하고 잘나가는 여성들이 ‘센 여자’ 등의 의미를 담아 스스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기도 한다. 가부장제에서 규정한 ‘좋은 여성’을 스스로 벗어나겠다는 주체적 표현인 것이다. 책 속 암컷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여성성’에 갇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이들은 방탕하고 쟁취하고 군림하며, 거기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암컷들은 생각보다 음탕하고 포악하다. 암사자는 난교로 유명하다. 발정기 중에 수컷 다수와 하루 최대 100번까지 짝짓기를 한 암사자도 있다. 침팬지 암컷도 만만찮다. 평생 5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지만 수컷 수십 마리와 6000번 넘게 교미한다. 번식에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과도하게 성적 활동을 하는 것이다. 암거미는 저녁 식사와 데이트를 한 번에 해결한다. ‘성적 동족 포식’은 전갈, 나새류, 문어 등 무척추동물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토피영양 암놈, 유인원 등은 수컷을 쟁취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운다. 우두머리 암컷 한 마리가 씨족사회 번식의 80%를 독점하는 미어캣은 암컷들이 무자비한 번식 경쟁을 벌인다.
암컷은 양육하고 희생하는 존재이자 신비로운 모성 본능을 타고난 존재라는 오해가 만연해 있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서 암컷이 임신과 수유의 책임에서 풀려나면 수컷이 자식에게 더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이 흔하다. 조류에서는 부모가 함께 자식을 돌보는 경우가 90%에 이른다. 물고기는 전체 종의 3분의 2가 수컷이 양육 책임을 전적으로 진다. 심지어 해마는 수컷이 출산까지 한다. 양서류는 종에 따라 다양한 돌봄 전략을 보여준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한 성만이 새끼를 돌보도록 프로그래밍되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실은 동물의 성을 암컷과 수컷으로 구분하는 일조차 간단하지 않다고 책은 말한다. 다듬이벌레부터 아프리카코끼리까지 암컷 수십 종이 흔히 남근으로 묘사되는 애매한 생식기관을 가졌다. 많은 종이 환경적으로 성을 뒤집는다. 어떤 올챙이는 XX 유전자를 가지고도 수컷이 되고, 턱수염도마뱀은 뜨거운 날씨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암컷이 된다. 어떤 암컷들은 에스트로겐이 촉진될 것으로 기대되는 임신기에 ‘남성호르몬’으로 알려진 테스토스테론을 폭발적으로 분비한다.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이 양방향으로 변환되며, 남성과 여성에 모두 존재한다는 사실을 책은 보여준다. 유전자 레시피는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저자인 루시 쿡은 옥스퍼드대학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제자로서 동물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생물학 연구와 현장 탐사를 넘나들며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오해의 동물원> 등 책을 펴냈다. 그는 “막연하게 과학이란 당연히 과학적일 것이라 생각”해온 과거를 고백한다. 그는 “대학에서 복음처럼 배운 진화생물학의 기본 개념들이 편견에 의해 왜곡돼왔다는 것은 충격적 깨달음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가 개인적 인지에서 벗어나 동물의 세계를 진정 공정한 눈으로 볼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고 썼다.
공정한 연구를 위해 과학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구성에도 다양성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암컷 오리의 복잡한 생식기관을 연구한 진화조류학자 퍼트리샤 브레넌은 저자와 인터뷰하며 이렇게 말했다. “과학 하는 사람들도 모두 나름의 성향이 있어요. 나는 여성이고 나한테는 질이 있어요. (조류의 질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죠.” 그는 덧붙였다. “과학에는 뜻밖의 재미가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는다면 답도 찾을 수 없겠지요. 올바른 질문을 하려면 이걸 살펴볼 여성이 있어야 해요.”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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