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스마트폰 위 세계대전 韓반도체 '선택의 순간'
치밀한 고증 거친 역사학자가
국가간 경쟁의 핵심 꿰뚫어
美에 맞서던 러시아는 참패
中 패권 쟁취도 만만치 않아
韓 '전략적 아군' 잘 찾아야
20세기가 석유 전쟁의 시대였다면, 단언컨대 21세기 가장 중요한 전쟁은 반도체 전쟁(Chip War)이다. 80억 인구가 이것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가전기기, 디지털 기술, 인공지능(AI), 국가 안보 등 모든 분야의 핵심 요소가 된 반도체 산업. 이를 둘러싼 전쟁은 2차 세계대전보다 전장이 넓고 더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예일대와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역사학자로 터프츠대 국제관계대학 국제사 교수인 크리스 밀러는 놀랍게도 이 전쟁의 전모를 밝힐 최적임자다. 소련의 몰락을 다룬 '푸티노믹스' 등 러시아 역사서를 여럿 쓴 밀러는 러시아 문서보관소를 뒤지고, 전 세계 주요 인사 100여 명을 인터뷰해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의 핵심을 꿰뚫는 저술을 완성했다.
그에 따르면 반도체 전쟁은 결국 미국의 패권에 도전한 러시아와 일본의 실패, 중국의 도전과 미국의 응전이라는 역사적인 맥락의 이해가 필요하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긴박감에 비견한 뉴욕타임스 비평처럼, 이 책의 이야기는 대만해협에서 시작한다. 2020년 8월 미군 구축함 머스틴호가 이곳에 출몰하며 중국 인민해방군이 보복 사격으로 대응하게 했지만, 무력의 충돌보다 더 큰 전쟁이 이미 시작된 상황이었다. 미국 상무부는 수출통제 명단을 발표해 군사시설과 소비재 등에 사용된 컴퓨터 칩을 바싹 조이기 시작했다. 화웨이는 글로벌 확장에 발이 묶였고 중국은 깨달았다. 중국의 목숨이 반도체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밀러는 심지어 중국의 석유와 원자재 수입 항로인 믈라카해협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학자들을 '책상물림 전략가'라고 폄하한다. 그는 강철과 알루미늄이 2차 대전의 승부를 갈랐지만 21세기 전쟁은 컴퓨터의 힘으로 판가름 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밀러는 아시아가 공산주의에 맞서 평화를 유지하며 20세기 후반 극적 성장을 한 비결도 실리콘(반도체 원료)을 발판 삼아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조립하는 일에 특화됐고 집적회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심지어 세계 최대 기업 애플은 제품에 들어가는 칩 중 단 하나도 만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칩은 기성품이며, 핵심 프로세서는 자사 설계를 제조하는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대만 TSMC 공장에서만 만들 수 있다.
애초에 1960년대 미사일 궤적을 계산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이 실리콘 칩은 결국 우주선에 사람을 실어 달에 보내는 계산을 해냈고, 군사 산업을 넘어 전자 산업에서 돈을 긁어모았다. 컴퓨터, 인터넷, 무선 통신의 탄생에는 반도체라는 주연이 있었다. 소련은 '베끼기'에 급급하다 처참하게 실패했고, 1970년대 일본은 미국의 반도체 패권에 도전하다 철퇴를 맞는다.
미국은 전략 자산인 반도체 산업의 패권을 일본이 쥐는 걸 막기 위해 대항마의 가능성이 있던 한국의 출현을 반겼다. 한국을 다룬 챕터 제목은 '적의 적은 친구다'이다. 이 신화적 서사의 주연은 미국, 일본, 대만, 중국이지만 한국은 '신 스틸러(명품 조연)'처럼 책에 등장한다.
반도체 칩을 만드는 공정은 SF소설 작가도 상상하지 못했을 '마법'에 가깝다. 칩에 회로를 그리기 위해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파장인 극자외선을 생성하는 일은 기적과 같다.
지름 0.003㎜인 주석 방울을 진공에서 시속 321.8㎞로 날려 보낸 후, 그 작은 방울을 레이저로 두 번 적중시켜 플라스마 상태로 만들고 폭발시켜야 한다. 그렇게 1초에 5만번 이상 폭파를 해내야 겨우 산업용으로 쓸 만한 에너지의 극자외선이 나온다. 이런 공정을 거친 아이폰12의 칩에는 무려 118억개 트랜지스터를 새긴 실리콘 조각이 담겨 있다.
이 책의 교훈은 반도체는 미국이 발명해 전 세계가 발전시킨 공급망의 산물이라는 것. 수십 개국의 기술과 자원이 필요한 이 과정은 동시에 엄청난 취약성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앞에 정해진 미래는 자유 무역의 쇠퇴와 경제 블록화 시대의 도래다. 평화 배당의 시대가 끝나면서 칩을 만들기 위한 비용과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지점은 러시아가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얼마나 처참하게 실패했는지 보여주는 챕터다. 고립된 중국 또한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으며 대만을 침공하지 않는 이상 힘의 균형은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아군은 명확하다.
그래서 이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미국의 칩스법은 대부분 로직 칩에 주안점을 둔 것이라 한국 반도체 산업의 핵심인 메모리칩이 아니며 "칩스법을 향한 한국 언론의 분노는 사실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정치와 안보를 염두에 두고 공급망 확충의 결정을 내리라"는 값비싼 조언을 건넨다. 가장 멍청한 짓은 반도체 국수주의를 앞세워 기술 독립과 죽창가를 외치는 일이며, 기술 우위를 우리 스스로가 정치적 갈등으로 놓쳐버리는 일이다. 밀러의 조언은 냉정하다. 그는 중국의 추격에 격차를 유지하고 기술을 선도하는 것이 반도체 전쟁 승리의 유일한 방법이며, 이를 위해선 "한국 기업이 기술 우위를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하는 길뿐"이라고 덧붙인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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