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그들은 어째서 ‘가해자’가 되었나[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3. 5. 1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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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로 대표되는 신군부의 정치장교 그룹
독재정권 유지와 저항 제거 임무 주요시
이데올로기 주입·상하 명령 복종 체계로
현장 군인들이 총과 칼을 시민에게 겨눴다
신군부 고위층 승승장구하는 동안 고립된 군인들
자신·피해자·사회와 화해할 제도적 기회 없었다
연합뉴스 나경택의 사진집 <앵글과 눈동자> 가운데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한 청년을 곤봉으로 무참하게 폭행하는 모습. 연합뉴스

오월의 정치사회학

 곽송연 지음|오월의봄|216쪽|1만7000원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문장이다. 한강은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인도적 이유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납탄을 병사들에게 지급했다”고 적었다. 이어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다. 왜 어떤 군인들은 특별히 잔인했고, 어떤 군인들은 소극적이었을까? 곽송연의 <오월의 정치사회학>은 이 같은 의문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왜 그런 일을 벌였을까? 또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오월의 정치사회학>은 1980년 5월의 광주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 초점을 맞춰 바라본다. 대한민국의 군인이 왜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고, 무참히 짓밟았을까. 그들이 특별한 악인이나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정치적 상황과 맥락에서 학살에 가까운 폭력이 벌어졌는지를 아는 것은 앞으로 벌어질 또 다른 학살을 막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곽송연은 5·18을 ‘정치적 학살’로 규정하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의 관점에서 5·18을 분석한다.

1980년 5월24일 광주 시내에서 계염군이 교련복 차림의 고등학생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들은 어떻게 학살의 가해자가 되었나

“소령 놈이 뭐라그러냐믄 이북에서 첩자를 내려보내갖고 그놈들이 유언비어를 유포해가지고 광주가 쑥대밭이 되아부렀다고 글드만요. … 거그서 출동, 제가 차 타고 비행장 나오면서도 그랬어요. 이 새끼들 가기만 해. 나한테 죽어 이놈의 새끼들.”

“무조건 저 새끼들은 빨갱이라고 … 저놈의 새끼 잡으믄 죽인다고 했죠. 위에선 빨갱이라고 하는데, 저희들은 라디오도 못 들었어요. 텔레비도 못 보고, 긍께 위에서 시키는 대로.”

5·18 당시 28세였던 20사단 수색중대장 김덕수의 증언이다. 그는 군 상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빨갱이’에 대한 적대감을 지닌 채 광주에 도착했다. 계엄군은 이미 ‘빨갱이’를 사살할 준비가 돼 있었다.

저자는 지도자·고위간부와 정규군 등 가해자의 지위에 따라 학살에 참여한 동인과 행동양식을 구분해 설명한다. 지도자·고위간부가 학살을 계획하고 명령하는 이유가 이데올로기나 신념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면, 정규군은 명령체계에 따른 복종, 이데올로기 주입 효과, 동료집단의 압력과 집단의 순응성 등 요인이 복합적으로 결부돼 작동한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반공은 강력한 국가 이데올로기였다.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이승만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반공은 하나이며, 자신에 대한 반대도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는 걸 공식화”한다.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학살은 2만3000~3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 4·3사건, 2만5000명 민간인 피해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여순사건, 최소 20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보고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으로 이어졌다. “공산주의자(빨갱이) 또는 그 혐의가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국민의 범주에 속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학살의 경험’은 전두환과 신군부에도 이어졌다. 1979년 10·26 박정희 사망 이후 민주화의 열망이 높아졌지만 전두환과 신군부는 12·12와 5·17에 이르는 다단계 쿠데타를 기획·실행하며 이를 억눌렀다. 그들은 반호남주의와 반공주의를 결합한 이데올로기를 동원, 광주항쟁의 주요 의제였던 민주화 요구를 반영남적 태도로 왜곡하고 국가혼란과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몰아갔다.

신군부의 친위부대적 성격과 ‘하나회’로 대표되는 정치장교 그룹은 군이 독재자 권력 유지와 이에 대한 저항에 대처하기 위한 임무를 군 본연의 임무보다 우선해 수행하게 만들었다. 하나회 파벌은 박정희의 정치 노선에 충실한 전두환, 노태우 등 강경 소장 장성들로, 1979년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취임을 전후해 수도권의 주요 사단장급으로 포진해 있었다. 파벌 위주 관계망은 군 공식 지휘계통보다 우선됐으며, 5·18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특수전사령부(특전사)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미군 관할을 벗어나 있어 실질적으로 군부의 지휘를 받았기에 정치적으로 동원되기 쉬웠다.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을 진압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광주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공수특전단은 장기근속자 위주의 전문화된 특수부대로 “친위부대 의식과 우월감”에 차 있었다. 저자는 고도로 전문화된 특수부대인 공수특전단이 5·18과 같은 “살인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덕적 틀”이 제공된 상태에서는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여지가 농후하다고 분석한다. 공수특전단 투입이 과잉 진압, 학살로 이어지는 결과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공수특전단은 또한 ‘한 팀은 혈육과도 같은 인간관계로 엮여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높은 밀착력과 결속력을 지니고 있었다. 끈끈한 유대감을 가진 지휘관의 명령은 힘이 셌다.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에겐 지휘관은 직접 시범을 보이며 “더욱 강경한 방법을 동원하라고 지시”했다. 저자는 “5·18 당시 지휘관의 명령 강도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으며, 그 결과 시민들의 사상 피해가 가중되었다”고 말한다.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는 광주 시민들에 대한 ‘정서적 거리’를 만들었다. 심리적 거리는 한 개인의 공감능력을 제거한다. 한국전쟁 이후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 혐의를 씌울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국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공식적 경계가 확립된 상황에서 공수부대 병사들은 광주 시민들이 ‘공산당’이라는 말을 듣고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 이르는 국가 건설기와 베트남전을 통해 두 번의 민간인 학살을 겪은 ‘제노사이드 경험’ 또한 영향을 미쳤다. 공수특전대는 탄생 과정부터 베트남 파병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69년 8월 정식 출범한 특전사는 1970년 6개월 단위로 부대원들을 베트남에 보냈다. 책에는 공수대원이 시민들 앞에서 대검을 빼 들고 ‘월남에서 베트콩 여자 유방을 자른 기념 칼이다’라고 자랑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취임선서를 하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신군부 최상층 지도부 전두환과 노태우는 그 후로 13년간 바통을 이어받으며 최고권력자에 올랐다 최근 숨을 거뒀다. 1996년 5·18 관련 수사로 최종적으로 6명만이 기소됐으며, 살인 행위 역시 전남도청 진압 작전 과정에서 숨진 17명에 대한 것이 전부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채 2년이 안 되는 수감생활을 마치고 모두 사면·복권되었다. 나머지 발포 사건들, 민간인 학살, 암매장, 집단 성폭행 등에 의해 사망·부상한 시민들에 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묻지 못했다. “진실의 장막 뒤에 가려진 채로 40여년을 살아”온 그들 중 누군가는 자책과 트라우마에 시달렸을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전두환처럼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5·18 학살에 참여한 군인들이 사실을 직면해 고발하고 고백하고 참회할 수 있는 제도적 창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자신과는 물론, 피해자·사회와 화해하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다. 신군부 고위층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이들은 고립돼 있어야 했다. 저자는 “그 부분에서만큼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며 그들의 증언이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지체된 정의를 직면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국가에 의해 버려진 한 인간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뒤늦은 대가이자 의무일 것이다.” 저자는 5·18진상조사위가 2021년 5월31일 작전에 참여한 군과 시위 진압에 투입된 경찰의 사망·상해 등에 관한 피해 조사를 의결한 일이 고무적이라고 말한다.

5·18에 투입된 군인들은 근본적으로 가해자이지만 잔학 행위의 목격자이자 국가에 의해 징집된 한 시민이기도 하다. 저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중적 자리에 있는 정규군의 위치에 대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두환이 5·18민주화운동 9개월 뒤인 1981년 2월18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지나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 제12대 대통령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광주를 방문한 전두환을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은 전씨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고 있다. 금남로는 5·18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숨진 곳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왜 다른 지역은 침묵했나

5·18 당시 국가는 철저하게 학살 사실을 부인·은폐했다. ‘배후’를 학생, 깡패, 북괴 고정간첩과 불순분자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대중선동, 민중봉기, 정부전복을 위해 학생 소요를 배후 조종한 김대중과 그의 추종자들”로 몰아간다. 광주를 물리적으로 철저히 고립시키고 언론을 통제한다. 당시 신문은 대장에 검열관들이 ‘검열필’이라는 붉은 도장을 찍어주어야만 인쇄할 수 있었다. “기사의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그 차이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흡사한 진압 관련 보도”가 이뤄졌다.

조선일보는 “ ‘무정부 상태의 광주’…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서울신문은 “군인을 잡아 낫으로 찔러 죽이고 껍질을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썼다. 중앙일보는 더 나아가 ‘민주주의 발전에 역행’하는 지역으로 광주를 대상화하며 “치안 공백 상태에서 강도들이 밤마다 약탈 행위를 자행, 양민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1980년 5월27일 1면 ‘계엄군의 광주 장악’이라는 표제어로 기사를 실으며 기사 하단에 ‘사회 혼란 야기 노린 유언비어 강력 단속’이란 제목으로 치안본부장의 지시 사항을 배치했다.

당시 국가는 ‘김대중의 집권욕이자 영남 발전을 질시해온 해묵은 감정’을 5·18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광주는 반공주의와 지역주의 담론 속에 극단적 사적 이익을 추구한 집단이 되어버리면서 다른 지역의 대중과 심리적으로 분리됐다. “도로와 같은 물리적 통로뿐 아니라 ‘말’ 역시도 철저한 봉쇄에 막혔고, 이러한 고립된 담론 환경에 대중 인식이 지배됐다.”

지식인의 방조와 협력도 한몫했다. 저자는 나치 점령기 비시 정권에 협력한 문인들에 대해 프랑스 지식 사회에서 ‘윤리적 책임’ 문제를 놓고 전국작가위원회가 진행한 청산 작업이 이뤄진 것을 언급하며 “지식인의 ‘윤리적 책무’를 되묻는 사회적 반성의 필요 자체가 생략된 우리와는 대조적인 풍토”라고 말한다.

통나무를 어깨에 메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순화훈련을 받고 있는 삼청교육대 수용자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삼청교육대 등 ‘강제수용소’, ‘망각의 정치’로 진실 덮은 전두환

저자는 전두환 정권을 전체주의적 국가로 규정한다. 삼청교육대로 대표되는 강제수용소를 통해 전체주의적 지배 기반을 닦았다. 총 6만755명이 영장 없이 체포돼 불법구금, 가혹 행위를 당했으며 고등학생, 대학생, 교수와 교원, 공무원, 언론인 등이 포함됐다. “신군부에 협조하지 않거나 걸림돌이라고 판단되는 정치인과 노동운동가, 민주인사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전두환은 취임 후 담화문을 통해 ‘사회정화’라는 말을 내세웠는데, 나치가 유대인 학살 이전에 표방한 ‘사회정화’,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인간청소’와 유사한 제노사이드적 사고를 보여준다.

전두환은 취임 이후 망각의 정치를 시작했다. 1981년 2월 이후 5·18에 대한 직접 언급은 사라지고 ‘10·26 이후의 혼란’이라고만 칭한다. 광주와 호남 지역엔 도로, 다리, 댐 건설 등 경제적 보상으로 “호남 지역 주민의 피해의식 근원을 차단”하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연구 자료를 통해, 1980년 이전에 호남 주민이 영남 주민을 특별히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역주의를 호남의 영남에 대한 고정관념과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갈등으로 보고 물질적 보상을 통해 그를 극복하겠다는 논리는 “국가가 창조한 지역주의 신화의 스토리텔링에 불과하다”고 본다.

얼마 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이 전 세계 국가들의 민주주의 지수를 발표했다. 2021년 16위였던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은 2022년 8단계 아래로 떨어진 24위를 기록했다. 최하위 점수를 받은 것은 정치문화다. “극단적 대결의 정치문화가 정치적 제약에서 자유로운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고 있다.” 긴 논의 끝에 저자가 내린 결론은 현재 한국 사회를 향한다. “다시 시선을 돌려 우리 안의 배제의 문화를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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