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장 뜨는 여자 차정숙은 표독해지는 법이 없다

김교석 칼럼니스트 2023. 5. 1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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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큰 캐릭터 엄정화가 만드는 여성연대가 통쾌한 까닭(‘닥터 차정숙’)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JTBC의 히트 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좀 뻔뻔하다. 그리고 영리하다. 최근 나온 드라마 중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통속적인데 그 통속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 키치할 정도로 클리세를 기꺼이 활용한다. 가족의 불화, 불륜, 이혼 등등의 소재가 익숙한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의 클리세를 범벅해서 전면에 내세우고, 십여 년 전 유행한 촌스럽고 올드할 수 있는 줌마렐라 판타지를 2023년에 천연덕스럽게 펼쳐 보인다.

이 드라마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경력 단절된 주부 차정숙(엄정화)의 자아실현 과정을 밝고 가볍게 풀어낸다. 현실성 떨어지는 전개와 개연성의 부재는 어디까지나 코믹극이라는 가벼움으로 적절히 무마시키고, 메시지가 품은 통쾌함은 배우 엄정화가 가진 매력으로 폭발시킨다. 그 덕분에 이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드라마의 시청률은 계단식으로 점프하며 SBS<낭만닥터 김사부3>와 함께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 중(일일, 주말극 제외) 유이하게 시청률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46살의 전업주부 차정숙은 늘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자신을 위해 시간과 돈을 써본 적 없는 주부의 표상이다. 이후 각성하고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스토리에 힘을 싣기 위해 주부의 고충을 압축해 보여준다. 살얼음판 같은 고3 자녀, 20년째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남편, 며느리를 뽑아먹는 존재로 여기는 부잣집 시댁, 200% 탈락이라는 경력단절 주부의 현실과 사회적 시선, 남편에게 종속된 경제력 등 우리가 그동안 드라마를 통해 봐온 며느리, 주부의 모든 불행을 꾹꾹 눌러 담았다. 무려 의사 커리어를 포기함은 물론, 시부모 모시고,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에 20년간 전념한 희생과 헌신의 아이콘. 그러나 그 보답은 온가족의 무시와 불운의 병, 그리고 불륜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만의 인생을 찾는 차정숙의 각성과 그 전개의 우여곡절이 초반 5화까지의 서사와 통쾌한 분위기를 이룬다.

그런데 6화부터 기어를 변속한다. 어쩌면 이렇게 통속적일까 싶을 이야기에 불륜에 썸이 본격적으로 더해지고 혼외자의 사연까지 덧붙여지면서 50대의 일일드라마, 주말드라마 같던 전개의 향방이 갑자기 묘연해진다. 복수를 꿈꾸는 혼외자까지 등장해 친구 사이가 졸지에 자매가 되고, 가장의 오랜 불륜이 온 가족의 눈앞에 드러난다. 서브플롯으로 전개되고 있는 아들과 직장 직속 선배의 연애, 사기꾼이 의심되는 시어머님의 애인도 이 지리멸렬한 집안사에 한축이 될 불안요소들이다.

그런데 이런 클리세를 활용해 뻔한 말을 통쾌하고 명료하게 전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사랑과 전쟁>의 한 에피소드 같은 막장 설정과 전개, 연하남과의 로맨스라는 판타지 한편에다가 우리네 엄마, 주부로서 살아가는 공감을 꽤나 현실감 있게 담아낸다. 경제적인 종속에서 비롯된 주부의 낮아진 자존감, "여자도 일이 있어야 한다"는 친정어머니의 말씀, 진로문제로 갈등을 겪는 부녀 사이에 낀 처지, 다 큰 아들의 연애를 목도하게 된 엄마의 심정 등이 그렇다.

설정만 보면 막장이고, 치정극이지만 차정숙은 울상을 짓거나 표독해지는 법이 없다. 이게 바로 엄정화의 매력이며 이 드라마의 힘이다. 차정숙은 언제나 직시하고 늦더라도 답을 찾아내서 주변을 이롭게 만든다. 과장되어 있는데 현실감각이 없지 않고, 촌스러운듯 보이는데 속이 시원하다. 내 맘대로 살겠다는 각성을 욕설로부터 시작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는 남편에 대해 "죽었어요"라고 말하고, 고3 딸의 투정에 "왜 너 좋으라고 대학 가는데 엄마 희생이 당연한 거냐" 같은 말들이 시청자들의 속을 뻥 뚫리게 만든다.

김병철이 연기한 구제불능의 남편은 딸아이 미대 입시를 반대하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 천 만원 들어가는 자녀의 입시비용을 원한다면 엄마로서의 입장과 자아실현의 욕망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한다. 이에 대한 답으로 차정숙은 "그동안 밥 먹여줘서 너무너무 고마워"라고 일갈하고, 마이너스 통장을 뚫는 기백이 보는 이들의 속을 시원하게 만든다.

<닥터 차정숙>이 이혼의 용기를 내게 하는 줌마렐라 스토리의 회귀 정도였다면 통쾌함의 유효기간은 짧고 이야기가 복잡해지는 후반부 이 생생한 에너지를 유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가정이 있는 차정숙 앞에 본격적으로 펼쳐진 썸의 판타지도 판타지지만, 혼외자와 함께 나타난 상간녀와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는 기존 줌마렐라식 판타지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진입이다.

그러면서 <닥터 차정숙>은 주부 판타지에서 철저히 여성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쉬는 드라마로 나아간다. 극 초반은 진부한 막장 설정으로 점철된 듯 보이지만 점차 극중 등장하는 모든 여성 캐릭터들이 각성한 차정숙을 거치며 꽃봉오리를 틔울 가능성을 보인다. 의학드라마라고 하는데 모두가 병원에서 연애를 했던 예전 한국 드라마 특유의 관행과 주부들의 통쾌한 대리만족 판타지라는 익숙한 코드를 갖고 와 여성의 연대이자 이해로 발전시키는 전개로 나아가고 있다.

불륜녀, 혼외자, 사춘기 딸, 알고 보면 외로운 시어머니, 성깔 있는 젊은 상사, 친정어머니, 모두 주체가 되고, 문제가 되고, 욕망과 변화의 동력을 가진 인물은 여성이다. 따라서 <닥터 차정숙>이 단순히 통쾌함만 있는 주부 판타지 드라마라고 평하긴 섭섭하다. 코미디의 당의정 밑으로 지리멸렬한 치정극처럼 전개가 되지만 센 언니 전성시대에 차정숙은 카리스마가 아니라 친절하고 자애로운 주부의 힘으로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아우르는 '뉴타입'이다. 뼈 있는 말을 내뱉지만 관계를 끊는 전복으로 나아가지 않고, 감정을 해갈하는 결론으로 내딛지 않는다. 의도적인 클리세 위해 올려 세운 낙천적이고 포용력 있는 통 큰 캐릭터가 만드는 여성시대가 신선하면서도 유쾌하면서도 통쾌하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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