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845년 vs 15년
가상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건 관련 자본시장법상 사기적 부정 거래 혐의 등으로 기소된 신현성(전 차이코퍼레이션 총괄대표)씨는 1심에서 변호인단 30여 명을 꾸렸다. 고위 전관부터 자신을 수사하던 검사가 있는 법무법인에서 변호인을 선임하기도 했다. 테라·루나 폭락으로 전 세계 투자자들은 작년 50조원이 넘는 피해를 봤는데 신씨는 이 과정에서 1500억원대 부당 이득을 취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씨는 테라 1단위=1달러 가치를 루나로 유지한다고 홍보했지만, 애초 불가능했고 거래량을 부풀려 가치가 유지되는 것처럼 조작했을 뿐이라는 게 검찰 수사 결과다.
피고인의 방어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지만 사기쳐서 돈 벌고 고위 전관을 변호인으로 선임해 방패막이로 삼는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전관을 쓰는 이유는 보통 보석(保釋·조건부 석방)이나 양형 범위 내에서 낮은 형량 등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테라·루나 사건 주범인 권도형(테라폼랩스 대표)씨는 대형 법무법인에 자문을 구하며 거액의 자문료를 보냈다고 한다. 권씨는 몬테네그로 현지에서도 변호사를 선임하고 여권법 위조 혐의 재판을 받으며 법원에 보석금 40만유로(5억8000만원)를 조건으로 보석을 청구하기도 했다. 검찰이 보는 권씨의 범죄 수익은 2000억원대다.
국내에서 경제 사범에 대한 처벌 수위는 높은 편이 아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는 최대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 특경법상 사기 혐의로 선고한 최대 형량은 1조원대 피해를 입힌 옵티머스 사기 사건 주범인 김재현(옵티머스 자산운용 대표)씨가 작년 대법원에서 확정받은 징역 40년이다. 1조원대 다단계 금융 사기 범죄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 김성훈(전 IDS홀딩스 대표)씨는 2017년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대법원 양형위원위에 따르면 부정 거래 등으로 자본 시장의 공정성을 침해한 범죄는 피해액이 300억원 이상인 경우 징역 7~11년에 처한다. 감경하면 5~9년이고 가중하면 9~15년이다. 처벌이 조금씩 높아지는 추세라지만 해외와 비교하면 멀었다는 게 법조인들 중론이다.
선진국은 경제 범죄에 100년 이상 징역을 선고하는 경우가 많다. 다수에게 피해를 주며 자본 시장 경제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반(反)체제 사범이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사업가 숄람 와이스는 보험사에 5000억원대 사기를 친 혐의로 2000년 징역 845년을 선고받았다. 미국에서 다단계 금융 사기(폰지 사기)로 72조원대 피해를 입힌 버나드 메이도프는 2009년 징역 150년을 선고받고 82세의 나이로 교도소 병원에서 숨졌다. 메이도프는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 출신이란 점을 앞세워 30여 년간 수만여 명에게 투자금을 받았는데, 투자금을 운용해 수익을 내는 대신 다른 고객의 돈으로 수익금을 돌려막았다고 한다.
처벌이 차이 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법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개별 범죄마다 형을 합치는 병과주의를 택하고 있어 이같은 엄벌백계가 가능하다고 한다. 한국은 여러 범죄를 저지르면 혐의가 추가될 때마다 형(刑)의 절반씩 추가하는 가중주의다. 한 법조인은 “경제 범죄 주범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한다면 밑에 있는 모집책 등은 집행유예나 벌금형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며 “피해자가 다수인 경제 범죄에 대해 해외처럼 처벌을 강화해 말단까지 엄벌에 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경제 범죄를 저질러도 솜방망이 처벌로 잠깐 살고 나온 뒤 막대한 재산을 챙기면 그만이라면 어떻게 될까. 피해자들은 지금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테라·루나 사건 피해자들이 권씨를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 송환해 엄벌에 처하라고 요구할 정도다. 검찰은 최근 외신에서 권씨를 한국으로 데려와 사상 최장기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본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이 피땀 흘려 일군 재산에 피해를 입히면 감옥에서 여생을 마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해야 한다. 불법으로 돈을 벌었는데 처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경제 범죄는 반복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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