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너무한’ 세상 잊게 하는… 숫모르 편백숲길은 당신을 위한 길[강동삼의 벅차오름]

강동삼 2023. 5. 1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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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물자연휴양림 속 절물오름은 해발 697m로 전망대에 오르면 한라산과 제주시내가 펼쳐진다. 제주 강동삼 기자

세상에서 최대한 멀리, 아주 멀리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 사람들에게 준 상처로 마음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순간, 그 허허로움을 어디에서도 달랠 수 없어 오롯이 혼자이고 싶어질 때. 적요한 곳에서 오롯이 나와 정면으로 마주해 얘기하고 싶어질 때. 나를 감싸주며 위로해주고 싶어질 때… 윌리엄 워즈워스의 표현처럼 “우리에게 너무한” 세상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걷는다.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기울이다 보면 평정심을 되찾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닮은 한라생태숲길… 교통약자를 위한 휠내비길에 어울리는 산책

(5)절물오름과 명품숲길 숫모르편백숲길

절물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한라생태숲은 그런 나를 치유해주고 위로해주는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 시내가 화창할 때도 이곳은 물 머금은 안개에 휩싸이고, 소리없는 봄비가 촉촉히 내린다. 그토록 갈망했던 나 자신과의 만남이 여기에서는 가능해진다.

한라생태숲의 탄생도 상처받은 사람들을 닮았다. 훼손돼 방치됐던 야초지를 원래의 숲으로 복원한 곳이어서 더 그렇다. 입구에는 진짜 허허벌판을 개간하고 나무를 심고 연못을 조성하고 산책길을 조성하며 걸어온 길, 역사가 소개되고 있다.

‘걷기는 평등하다. 장애가 없다면 누구든 걸을 수 있다. 부유한 산책자라도 가난한 산책자보다 유리한 점은 전혀 없다’는 최근 읽은 책에서 나온 글귀처럼 이 산책로는 평등한 길이다.

아니, 장애가 있어도 이 곳에선 무장애 숲길이 있어 산책 약자들도 언제든 산책을 할 수 있다.

교통약자도 산책약자도 다 받아주는 무장애길이 펼쳐지는 한라생태숲. 제주 강동삼 기자

제주도는 국내 최초 휠체어사용자 길 안내 서비스인 ‘휠내비길’을 기반으로 시각·청각장애인을 포함해 모두를 위한 제주관광 환경 조성에 나섰다. 꿈은 이루어진다. 최근엔 한라생태숲에서 고정밀 위치 기반의 모빌리티 기술을 융합한 ‘교통약자를 위한 실외 길안내 서비스 고도화 사업’인 내비게이션 앱 시연회를 개최한 바 있다.

시각장애인 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이날 시연회는 안내소에서 출발해 제주 특산식물인 목련총림을 지나면서 단말기 음성안내와 동시에 경로 이탈 시 경고음과 함께 진동 알림 기능 및 갈림길 방향 안내 등의 체험이 이뤄졌다. 그동안 시각장애인이 앱을 사용할 시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원활한 안내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휠내비길 위치정보단말기를 휴대폰과 연결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한라생태숲 수생식물원에서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동영상 서비스도 제공됐다.

평소 한라생태숲에서 산책을 즐긴다는 오영훈 도지사는 “교통약자를 위한 실외 길안내 서비스는 제주 전체 인구의 30%에 가까운 교통약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일”이라며 “교통약자를 비롯한 모든 분이 제주관광에 어려움이 없도록 행정안전부를 비롯한 다양한 기관과 협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상처받은 땅은 모두에게 길을 열어주면서 스스로의 상처도 치유하고 있다. 베풀 때 상처도 치유되나 보다.

고로쇠나무와 때죽나무 사랑하고 격려하다가 한몸이 된 연리목. 제주 강동삼 기자

치유의 땅에는 제주의 상징 꽃인 진달래와 철쭉을 닮았지만 키가 크고 높게 자라는 참꽃나무숲, 혼효림, 벚나무숲, 구상나무숲, 단풍나무숲 길이 테마별로 조성돼 있다. 특히 고로쇠나무와 때죽나무가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하나된 ‘연리목’과 조우하고 보니, 상처받은 마음, 균열이 생긴 가슴 어느 틈이 촉촉히 메워지고 달래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과장 좀 하자면 조용필의 ‘추억속의 재회’에 나오는 가사처럼 ‘가까이 다가와서 아프도록 마주보며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를 보는 듯 하다. 어쩌면 어느 쪽이 고로쇠나무고 어느 쪽이 때죽나무인지 모를 정도로 둘은 하나된 모습으로 처절하게 사랑하는 중이다.

그러나 절정은 한라생태숲 뒤쪽으로 휘둘며 돌아가는 호젓한 숲길에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나올 법한 원시림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숫모르 편백숲길’이다.

# 걷기좋은 명품숲길로 선정된 숫모르 편백숲길

한라생태숲에서 절물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산림청이 선정한 걷기좋은 명품숲길 숫모르 편백숲길. 제주 강동삼 기자

지난 3월 국토녹화 50주년을 기념해 산림청에서 주최한 ‘걷기 좋은 명품숲길 경진 대회’에서 제주의 숫모르 편백숲길이 우수 숲길로 선정됐다. 거대한 숲 속에서 고아가 된 기분이 느껴질 정도다. 너무 고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저만치서 걸어오는 탐방객들과 조우한다. 여자 혼자 산책 나서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그만큼 적막하다. 그만큼 오소록(으슥한 뜻의 제주 방언)하다. 그런데도 저멀리서 여자 탐방객이 겁도 없이 터벅터벅 잘도 걸어온다. 내 우려는 기우였나 보다.

숫모르 편백숲길은 한라생태숲~개오리오름~절물자연휴양림~노루생태관찰원~거친오름을 연결하는 편도 총 8㎞ 숲길이다. 숲길 관리청인 제주도와 행정시는 협업으로 기존 노선을 연결해 숲길을 조성했으며, 숲길 노선에는 복수초, 박새, 변산바람꽃, 노루귀, 산수국, 고사리류와 노루, 운문산반딧불이, 큰오색딱따구리 등 사계절 동·식물이 분포하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한라생태숲의 자연 그대로를 느끼며 산책할 수 있는 숲길로, 숫모르란 숯을 구웠던 등성이란 뜻의 옛지명으로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옛숯굽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숲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환상의 숲길이다.

호젓한 숫모르편백숲길에서 만난 오솔길. 제주 강동삼 기자

특히 숲길 2.4㎞ 지점에 절물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숫모르 편백숲길은 오름 트레킹과 산림욕을 즐길 수 있게 곳곳에 평상과 벤치들이 놓여 있다. 한 여름 태양을 피하고 싶을 땐 이곳을 한번 더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형용사가 필요없는 말 그대로 치유의 쉼터.

숫모르편백숲길과 절물자연휴양림은 길게 하나로 이어져 있다. 절물자연휴양림은 제주도에서 제일 먼저 문을 연 휴양림이다. 1997년 7월 23일 개장했다. 서귀포에 주소를 둔 덕에 입장료와 주차료를 동시에 내야 했다. 제주시에 주소를 둬야만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반대로 제주시 사람들은 서귀포 치유의 숲이나 서귀포자연휴양림을 갈 때는 할인 혜택이 없다. 탐방객들이 항의하는 일이 잦은데다 도의회 감사에서 지적도 있었지만, 산림청은 타 시·도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쉽게 시행령을 개정할 수 없단다.

# 삶을 위로해주는 작은 안식처, 절물오름 전망대에서 만나는 한라산, 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비자림로

절물자연휴양림에서 만난 편백나무숲길과 소나무숲길, 절물약수터. 제주 강동삼 기자

어찌됐든 절물자연휴양림은 제주 최대의 삼나무 군락지로 관광객과 도민의 사랑을 받는 관광제주의 얼굴인 자연휴양림이다. 이 휴양림이 너무 유명하다 보니 이 숲속에 자리잡은 절물오름은 상대적으로 천대받는 기분이 든다.

절물이란 지명의 유래는 옛날 절 옆에 물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절은 없으나 약수암이 남아 있다. 약수터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는 신경통과 위장병에 큰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고 음용수로 많이 이용되고 있으며 제주시 먹는 물 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물론 절물자연휴양림에 조성된 산책로, 지금은 탐방로 데크 정비를 하느라 소나무숲길과 삼나무숲길 무장애길을 다 걸을 수 없지만 이곳에서의 피톤치드와 테르팬(terpene)을 맛보면 웬지 건강해질 것만 같다.

테르팬이란 식물 속에 들어있는 정유 성분이며 피톤치드와 같이 숲속의 공기에 포함돼 있다. 일종의 침엽수에 많이 들어있는 살균성, 방향성, 살충성 치료효과를 가지고 있고 천천히 걷는 사람의 자율신경을 자극하고 성격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절물자연휴양림이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라면 절물오름은 삶의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제격이다.

절물자연휴양림 연못에서 바라본 절물오름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절물오름은 두개의 봉우리로 큰 봉우리를 큰대나오름, 작은 봉우리를 족은대나오름이라 하며 큰대나오름은 표고 697m, 비고 147m, 둘레 2498m이다. 절물휴양림 약수암에서 절물오름 장승을 만나면 그 길로 약 30분만 오르면 정상을 만난다. 제1전망대 데크에선 한라산 풍광이 펼쳐지고 멀리 제주시내가 아른 거린다. 탐방객들은 1전망대에서 만나는 분화구를 한바퀴 도는 것도 게을리 해 제2전망대의 장관을 놓치기 일쑤다. 제2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의 아찔한 장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정상에서 땀을 식힐 겸 잠시 오랜 시간 멍 때리고 내려오면 비로소 겸손해진 나를 만날 수 있다.

절물자연휴양림 입구에서 펼쳐지는 편백나무숲길. 제주 강동삼 기자

그리고 우린 어쩌면 절물자연휴양림에서 힐링하는 것보다 휴양림으로 오며가며 만나는 비자림로 숲길에서 더 큰 위안을 받을 지도 모른다. 수백번, 수천번 다녀도 질리지 않는 이 도로가 있는 것만으로도 제주에서 사는 게 낙(樂)이다. 차를 그냥 도로 한복판에 멈추고 싶은 위험한 충동, 이 숲길을 오롯이 느끼고 싶은 충동에 한번쯤 사로 잡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캐나다에서 살다 돌아온 아들이 한 말이 떠오른다. 캐나다 어떤 숲길보다도 아름답다고.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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