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interview] ’축구계 멀티 플레이어‘ 이주현 해설, “제 축구 인생은 잡초 같았어요” (1편)
[포포투] 'IF'의 사전적인 의미는 '만약에 ~라면'이다. 은 '만약에 내가 축구 기자가 된다면'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누구나 축구 전문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됐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고 있는 'No.1' 축구 전문지 '포포투'와 함께 하는 은 K리그부터 EPL, 라리가 등 다양한 축구 소식을 함께 한다. 기대해주시라! [편집자주]
축구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인 ’멀티 플레이어‘는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 필드에서 직접 뛰는 선수는 아니지만 축구계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가 있다. 바로 SBS SPORTS 이주현 해설 위원이다.
대부분의 국내 해설 위원들이 그렇듯 그 역시도 ’엘리트 선수‘ 출신 해설 위원이다. 과거 K3리그, 태국 무대를 거치며 필드를 직접 누볐던 그의 경험을 살려 2017년 K리그 중계를 시작으로 현재 SBS SPORTS 소속으로 프랑스 리그앙을 중계하고 있다.
그를 부르는 또 한 가지 이름 중에는 독립구단 하위나이트의 ’대표 겸 감독‘도 있다. 지구상 존재하는 광물 중 가장 가격대가 높은 보석 중 하나인 하위나이트에 영감을 얻어 ’숨어있는 하위나이트 같은 선수들을 찾아내 좋은 팀으로 연결해 주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설립한 구단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축구를 꿈꾸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코치이자 에이전트 역할을 도맡아서 하고 있다.
축구 선수부터 시작해 에이전트, 해설 위원, 구단의 대표 겸 감독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축구계 멀티 플레이어‘ 이주현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 축구선수 이주현
해설 위원, 하위나이트 대표 겸 감독 등 여러 이름으로 활동 중인 그이지만 시작은 엘리트 축구 선수였다. 덕천초, 부곡중을 거쳐 당시 FC 서울 U-18팀이었던 동북고를 졸업한 그는 학창 시절 청소년 대표에도 선발될 만큼 유망한 축구 선수였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발목 부상을 당하게 됐고 이후 호원대에 진학했으나 축구 선수로서 원하는 삶을 이어가진 못했다.
여러 고민 끝에 그가 결정한 것은 군 입대였다. 축구를 그만둘 각오로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원동력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자신감을 되찾은 그가 전역 후 문을 두드린 곳은 K3리그였다.
군대 시절 얻은 자신감으로 다시 시작하게 된 축구 선수로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선수로서 발전하지 못하는 모습에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다시 슬럼프에 접어들었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낀 그는 조금은 생소한 곳인 태국 무대에 진출하게 되고 그곳에서 짧았던 선수 커리어를 마감한다. ’축구선수 이주현‘의 시작과 끝을 그에게 직접 들어봤다.
Q. 축구선수를 시작하게 된 계기?
학교 대표로 달리기 대회를 나가서 100미터 대회에서 2등을 했고, 자연스럽게 축구부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하지만 제의가 왔을 때는 안 했다. 이후 취미로 주말마다 다니던 축구클럽에서 경기를 뛰고, 골을 넣으면서 축구의 재미를 알게 됐고 부모님을 설득해 시작하게 됐다.
Q. 초, 중 시절 축구선수 이주현은 어떤 선수였나?
전성기도 있었고, 바닥인 적도 있었고, 어릴 때 대표팀에도 가보고, 득점왕도 해보고, 상도 많이 받아 보고, 전국 대회도 우승해 봤다. 우승해 본 경험이 많다. 나는 노력형 선수였다.
Q. 동북고 진학 후 학원 축구와 프로의 차이를 느낀 부분이 있다면?
학원의 단점은 성적을 많이 내야 했다. 그로 인해 강압적인 분위기가 많았고, 프로 산하 팀이 아니다 보니 체계적이지 않았다. 동북고는 운동할 수 있는 그런 환경들이 잘 만들어져 있었다.
Q. 이후 호원대에 진학한다. 호원대 생활은 어땠나?
끔찍했다. 고2 때 고3 선배들의 경기를 주전으로 다 뛰었다. 당연스럽게 대학 진학이나 우선 지명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믿고, 긍정적으로 보고 달려갔는데 고3 때 발목을 다쳤다. 팀도 성적이 안 좋아지고 나도 잘 안되고 대학에서도 철회하면서 갈 수 있는 학교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호원대 감독님의 전화를 받고 진학하게 됐다. 하지만 동북고라는 좋은 팀에 있다 가보니 아무래도 지방에 있고, 서울과는 환경이 너무 달랐다. 선수들의 목표의식도 차이가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동기부여가 많이 떨어졌다.
Q. 21살에 일찍 군입대한 이유?
당시 동기가 손흥민 선수인데, 손흥민이 함부르크에서 레버쿠젠에 갈 때쯤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기사가 많이 나왔다. 그런 걸 보면서 씁쓸했다. 같이 운동한 선수들은 프로로 가서 뛰고 좋은 대학을 많이 가는데, 나는 집도 어려웠고, 호원대에 간 게 아쉬웠다. (동북고 시절) FC 서울에서 지원을 받고, 호원대에서도 지원받았지만, 동북고보다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집도 어렵고 목표한 바도 안 나오고 해서 입대를 선택했다.
Q. 입대하고도 꿈을 놓지 않은 것인지?
사실 일병 때까지도 축구를 안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어린 시절 축구를 하면서 느꼈던 행복감을 군대에서도 느끼게 됐다. 군대 내에는 대부분이 엘리트 운동을 하지 않은 일반인이다 보니, (선수 출신인) 내가 ’손흥민 놀이‘한다고 할 정도로 축구를 제일 잘했다. 거기서 오는 행복감이었다. 그리고 상병이 됐을 때 집이 좀 좋아져서 다시 축구를 한다면 집에서도 지원하겠다고 했고 그때부터 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Q. 제대 후 동남아 진출, 생소한 곳이었는데 계기는?
제대 후 수소문을 통해 서울 유나이티드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K3리그를 가서도 입대 전과 똑같았다. 서울유나이티드에 가서도 발전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조급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해외에서 뛰고 싶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해외 팀은 동남아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춘천시민축구단에 있던 베테랑 선수가 동남아에서 활동했던 선수다. 내 운동 스타일을 보고 추천을 해주고 에이전트도 주선을 해줬다.
Q. 태국 축구 열기는 어땠는지?
좋았다. 아마 가보면 알겠지만, 방콕이 엄청 시내다. 자기가 좋아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다닐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고, 프리미어리그나 축구가 있을 때 펍에서 맥주 먹으며 축구 보는 문화도 발달했다. 환경 자체가 국내보다 더 편한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Q. 태국에서 뛸 때 가장 기억나는 경기?
컵 대회 경기가 있었는데 상대 선수가 과격한 파울을 당해서 싸움이 붙었다. 벤치에서도 뛰어나왔다. 패싸움처럼 주먹과 발이 날아다니는데 갑자기 이단옆차기가 지나갔다. 태권도를 했던 한국인 동료였다. 상대 선수가 쓰러지고 결국 경기가 중단됐다. 다음날 신문에 날 정도였다.
Q. 은퇴 결심 계기는?
광대뼈 함몰 부상을 입으면서 시즌 아웃이 됐다. 또 재계약 과정에서 원했던 연봉협상이 잘 안되면서 팀을 옮기게 되었다. 한국인이 없는 곳이 처음이었다. 숙소도 좋았지만 혼자 먹고 자고 해야 하다 보니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못 버틸 것 같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더 좋은 팀에 갈 수 있었을 거 같았다. 혼자 있다 보니 이 일을 그만두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됐다.
그는 ’축구선수 이주현‘의 삶을 ’잡초‘라고 표현했다. 자신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없겠지만, 자신이 꿈꿔왔던 선수 생활을 모두 이뤄냈기 때문이다. ’잡초‘같았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그는 ’인간 이주현‘으로서의 다음 스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에이전트 이주현
그렇게 축구 선수로서 이른 은퇴를 결정한 그가 선택한 길 중 하나는 에이전트였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에이전트라 부르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한다. 정식으로 에이전트 일을 공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수 시절을 보냈던 동남아의 인프라나 인적 자원들을 이용해 선수들을 해외로 보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과거의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선수들을 도와주고 싶단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게 여러 선수들과 인연을 쌓기 시작했고 이젠 어느덧 조소현(토트넘 홋스퍼 FC 위민), 김정미(인천 현대제철 레드엔젤스) 등 스타급 선수들의 매니지먼트도 담당하고 있다. 축구선수 이후 선택한 ’에이전트 이주현‘의 삶을 그에게 직접 들어봤다.
Q. 에이전트 일을 선택한 이유?
원래 에이전트 일을 하려고 했다기보단 선수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다. 직업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에이전트라는 말을 사용한 거고 어디 가서 에이전트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해외에 어떤 인프라가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협조가 가능하다고 하지, 전문적인 에이전트라고 자처하진 않는다.
Q. 에이전트 꿈꾸는 사람들이나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소개해 줄 수 있는 것?
스포츠 에이전트는 연예인으로 치면, 그 사람의 매니저가 되는 거다. 선수들이 뭘 원하는지 목적을 에이전트를 통해 해소를 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봉협상이나, 이적 과정이나, 광고를 가져오는 일이나, 스폰서를 가져오는 거나, 모든 부분을 이 선수를 가지고 만들어야 하지 않나. 그게 훌륭한 에이전트라고 생각한다.
Q. 조소현 선수의 매니지먼트도 담당하고 있다. 계기는?
이재성 선수가 맺어준 인연이다. 2020년 홀슈타인 킬에서 뛰고 있는 이재성 선수의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조소현 선수를 만나게 됐고 경기 후 이재성 선수 집에서 가진 식사 자리에서 제의를 했다. 조소현 선수 같은 경우 여자 축구를 대표하고 인지도도 있는 선수라서 그 당시 좋은 조건으로 에이전트 일을 받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내 제안을 소현 선수도 오케이 했고 그때부터 일을 같이 하게 됐다.
Q. 선수를 도와주는 일인데 에이전트 일을 하면서 뿌듯하거나 보람을 느낀 적?
대학 때까지 운동한 친구가 팀이 없어서 감독님을 통해 소개를 받았는데, 얘기해 보니 동남아에 갈 의사가 있었다. 운동을 같이 해보면 (이 선수가) 어느 정도 통할지 느낄 수 있는데, 많이 약했지만, 의지나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시도해 봤다. 어렵게 팀을 태국에서 구했다. 부모님도 좋아하셨다. 처음으로 과일도 받아 보고, 금액을 떠나서 부모님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봤을 때 뿌듯했다.
해설 위원, 하위나이트 대표 겸 총감독 이주현의 삶은 ②편에서 계속됩니다.
콘텐츠 제작=’IF 기자단’ 1기
글=이종관, 고민성
사진, 영상=문선우, 윤세영
현장 취재= 용환주, 고민성, 김아인
자료 조사=김상영, 박건영, 정예건, 황동건, 이종관, 김승민,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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