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총리의 한국 방문 계기로 확 달라진 일본 분위기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인일수록 한국 문화 마니아 많아
(시사저널=유재순 재일 작가)
5월10일로 취임 1주년을 맞이한 윤석열 대통령. 국내 언론의 1주년 특집기사가 넘쳐나는 가운데, 이례적으로 일본 언론에서도 윤 대통령의 취임 1주년을 부각시키며 새삼 한일 관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외교·안보 관련 기사뿐 아니라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의 관계 등 내치 문제까지 시시콜콜 취재해 보도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엣-취'하고 재채기라도 할라치면 일본에서는 윤 대통령이 감기에 걸렸다고 바로 서울발로 소식을 전할 만큼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일본 언론의 논조가 확연하게 변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3월6일 한국 정부가 강제연행 노동자 배상 문제에 대해 제3자 변제안을 해법으로 공식 발표하자 일본 언론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기시다 정부 또한 내심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국 내의 격렬한 반발에도 제3자 변제안을 과감하게 밀어붙인 것에 대해 기시다 정부는 물론 여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이젠 윤 대통령을 믿을 수 있겠다"는 교감이 폭넓게 퍼져 나갔다. 이러한 관심에 이어 4월24일자 워싱턴포스트 인터뷰를 계기로 윤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가 일본에서 급상승했다.
4월24일자 워싱턴포스트 보도가 변곡점
"사실 그동안은 윤 정부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어요. 역사 문제에서만큼은 한국 국민이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걸 잘 아니까요. 그래서 일정 기간 한국 국민의 반응과 윤 정부의 대응을 지켜보자, 그렇게 관망하는 자세였습니다. 역시 저희가 예상한 대로 한국 국민의 반발이 거셌어요. 그런데도 윤 대통령이 과감하게 밀어붙이더군요. 솔직히 우리는 윤 대통령이 국민의 격렬한 반발에 부닥치면 한일 관계고 뭐고 중도 포기하리라 생각했어요. 지지율도 1년 내내 낮았고. 그런데 자민당 내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윤 대통령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였습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윤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굳히는 계기가 됐어요. 그리고 일사천리로 기시다 총리의 한국 방문 얘기가 거센 물살을 탔고."
"8월 예정했던 기시다 방문, 5월로 앞당겨"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는 일본 중의원의 현역 보좌관이다. 윤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100년 전 역사 때문에 일본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언급했다.
한국 방문 시기도 훨씬 앞당겨졌다. 원래는 8월 즈음에 한국을 방문하기로 잠정 예정돼 있었지만 기시다 총리와 자민당 내 고위 간부들이 몇 번의 회합을 가진 후 전격적으로 5월7일 한국 방문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러한 결정은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자민당에서도 획기적인 한국 외교 방향 전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한다. 자민당 내 한 파벌 좌장과 친밀한 관계인 한 일간지 기자는 기시다 총리의 전격적인 한국 방문엔 일본 정부의 고도의 전략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사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윤 정권을 불안해했습니다. 끊이지 않는 구설, 좀체 40%를 넘지 못하는 낮은 지지율, 검사 출신 윤 대통령의 강압적인 통치 스타일, 대일 외교에 대한 범국민적 반발 등 일본 정부는 한국 정세를 모두 파악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기시다 총리의 방한은 윤 대통령을 어떻게든 도와줄 필요가 있다는 자민당 원로들의 교감이 반영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5월7일 기시다 총리의 1박2일의 예상을 뛰어넘는 한국 방문은, 워싱턴포스트 인터뷰 발언으로 국민적 반발에 부닥친 '운석열 대통령 구하기'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기시다 정부와 자민당이 전략적으로 곤란에 처한 윤 대통령을 도와주기 위해 8월 방문 시기를 앞당겨 5월7일 방문했다는 것이다. 물론 윤 대통령의 정치적 건재함이 일본의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기시다 총리와 자민당 원로들과의 회합에서 한국 방문 시 과거 역사 문제에 대한 발언 수위를 어느 선까지 해야 하는지 그 마지노선까지 의논했다고 한다. 기시다 총리가 "당시 혹독한 환경에서 많은 분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 아프다"고 한 발언도 사실은 자민당 원로들과의 회합에서 결정된 내용이라는 것.
실제로 일본 국회가 있는 나가타초 일부에서 회자되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일설에는 자민당과의 회합에서, 과거 역사 문제에 대해 한국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 기시다 총리에게 일임했다는 말도 나돌았다. 또한 방한 전, 외무성 한국 담당자가 과거 일본 정부의 견해를 총정리해 기시다 총리에게 건네주면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 계승한다"는 정도로 발언할 것을 건의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 자신이 개인적 의견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자민당 원로들과의 회합에서 그 정도 수위에서 발언하기로 의견 조율을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무튼 기시다 총리의 한국 방문 시 '가슴 아프다'는 발언은 진정 어린 사과를 기대했던 상당수 한국 국민에게는 미흡한, 그러나 윤석열 정부에는 "한국인의 마음을 열기 위한 일본 정부의 노력이 시작됐다(5월8일 대통령실 발표)"는 반응으로 귀결됐다. 이 같은 대통령실의 발표는 기시다 정부가 원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윤 대통령 입장에서도 기시다 총리의 방문은 3월16일 일본 방문 이후 이례적으로 최단 시간에 화답한 형식이 되어 절반의 성공으로 치부할 수 있게 됐다.
기시다 총리는 1박2일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과 개인적인 것도 포함해 서로 신뢰관계를 깊게 하는 의미로 대단히 유의미한 대화를 했다. 화제도 다양했지만 신뢰관계를 깊게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양국 간 인적 교류가 한층 더 활발하게 될 것이며, 상호 이해도 깊어가고 양국 간 관계 폭도 두텁게 될 것이다"고 술회했다.
기시다 총리의 한국 방문 성적표는 어땠을까? 기시다 총리는 5월8일 일본에 돌아간 후 같은 날 오후, 자민당 간부회의에 참석해 방한 보고를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번 방한을 계기로 일한 신시대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또한 윤 대통령 부부의 환대와 반응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다고 전해진다.
일단 일본 정부와 자민당은 이번 기시다 총리의 한국 방문 성과에 대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기에 처한 윤 대통령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일정 부문 체면치레를 하게 해주었다고 자평했다는 것.
일본 국민 또한 기시다 총리가 과거 역사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사과 표명을 하지 않은 것에 적이 안심하는 반응을 보였다. 일본 언론에 보도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더 이상 한국에 사과하면 안 된다. 이번에 한국까지 가서도 사과하지 않은 기시다 총리의 기개에 처음으로 지지를 보낸다" "윤 대통령의 결단에 감복했다.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에게 이런 결단력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단 이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번 셔틀외교 재개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설문조사(야후재팬)에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 이는 67.5%, 나쁘게 될 것이다 17.4%, 좋게 변화될 것이라고 응답한 이는 13.7%에 불과했다. 어느 쪽인지 말할 수 없다거나 모른다고 대답한 이는 1.3%.
한일 민간 교류의 해빙기 될 듯
지난 4월말부터 5월7일까지 일본은 골든위크로 1년 중 최대 연휴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인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바로 한국. 코로나 해빙 이후 꾸준히 늘어난 결과다. 일본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인의 특징은 개인 중심주의자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면 정치성은 어찌 됐든 행동으로 옮긴다. 반한·혐한 성향을 지닌 언론과 일본인들이 꽤 있음에도 일본 내에서 한류 문화가 꾸준히 정착할 수 있는 이유다.
여기에 한일 관계 화해 무드는 요리의 양념처럼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5월2일 백제 시대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구마모토현과 한국관광공사가 업무협약을 맺었다. 한국관광공사가 지자체와 개별적으로 연대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 화해 무드의 한일 관계가 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아리타야키(도자기)의 시조인 이삼평을 기리는 '아리타야키 축제'가 5월4일 사가현 도산신사(陶山神社)에서 열렸다. 민방에서는 전에 비해 한국 관련 방송이 부쩍 늘어났다. 유명 연예인이 한국을 방문해 먹거리, 볼거리, 쇼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최근 들어 급증했다. 아베 전 총리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친근한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룬다. 복원된 한일 셔틀외교로 인해 한일 민간 교류도 해빙기를 맞고 있다. 다만 여전히 경계의 분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돌발 사태가 발생해 양국 관계에 찬바람이 불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특히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극단적 정치세력이 문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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