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총선 D-2... '최고 성역' 왕실모독죄, 막판 최대 쟁점 급부상
진보 정당 "찬성" vs 보수 정당 "반대"
연정 불가피 탁신당, 미지근한 답변만
”당신은 왕실모독죄 개정에 찬성합니까? 예스 또는 노?”
진행자의 질문에 태국 진보 정당 후보는 1초의 망설임 없이 ‘예스’로 답한다. 반면 친(親)정부 정당 후보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노’를 외친다. 제1 야당 푸어타이당 후보 패통탄 친나왓은 한참을 망설이다 “세부 사항이 있는 만큼 ‘예, 아니오’로 말할 수 없다”고 답한다.
이달 초 태국 매체 더스탠다드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틱톡에 올린 동영상 일부다. 성노동자 합법화, 주류 산업 규제 완화 등 다양한 사회 이슈에 대한 의견을 각 당 총리 후보자들이 ‘예’ 또는 ‘아니오’로 재빠르게 답해야 하는 일종의 ‘인터뷰 게임’으로, 온라인상에서 수백만 건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후보들에게 공공연하게 왕실모독죄 존폐 의견을 묻는 부분이다. 이 사안을 둘러싼 논쟁이 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됐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진보 진영 "개정" 주장에 보수 진영 "반대"
12일 방콕포스트 등에 따르면 14일 총선을 앞둔 태국에서 왕실모독죄 개정 여부가 이번 선거의 막판 핵심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입헌군주제인 태국에서 왕과 왕실은 신성시된다. 예컨대 영화 상영 전 왕실 찬가가 나오면 모든 관객이 기립해야 할 정도다.
태국 형법 112조에 규정된 왕실모독죄는 왕과 왕비 등 왕실 구성원은 물론, 왕가의 업적을 모독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할 경우 최고 징역 15년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왕실이 존재하는 전 세계 국가 가운데 가장 처벌 강도가 높다. 사실상 왕과 왕실은 비판할 수 없는 성역인 셈이다.
왕실모독죄에 대한 공론화는 진보 정당 ‘전진당’의 약진에서 비롯됐다.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는 올해 3월 군주제 개혁을 공약 전면에 내걸면서 총선에 뛰어들었다. 초반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최근 전진당과 피타 대표가 젊은 층과 수도권에서 돌풍급 인기를 끌면서 당의 주요 공약인 왕실모독죄 개정 문제도 덩달아 최고 관심사가 됐다. 피타 대표는 "우리 당은 (선거에서 승리하면) 먼저 왕실모독죄 개정을 추진하겠다. 거부되면 폐지까지 추진할 것"이라며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기득권 세력은 ‘절대 불가’를 외친다. 루엄타이쌍찻당 총리 후보인 쁘라윳 짠오차 현 태국 총리는 “모든 이가 군주제를 사랑하기를 바란다”며 피타 대표를 비판했다. 군부와 연립정부를 이루고 있는 품차이타이당 아누틴 찬위라꾼 부총리 겸 보건장관도 “100년 넘게 존재해 온 제도 아래에서 모두가 행복한데 왜 바꾸고 없애려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지지율 1위 친탁신 당은 '골머리'... 연정 구성 변수
양극단으로 갈린 상황에서 골머리를 앓는 건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지지 세력인 푸어타이당이다. 푸어타이당은 현재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변이 없는 한 하원에서 최다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점쳐진다. 다만 다른 정당과의 연합 없이 단독으로 정부를 꾸리려면 500석 중 376석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 정도의 ‘압승’은 힘들어 보인다는 게 태국 정치권의 분석이다.
결국 연립정부 구성이 불가피해 보이는 만큼, 푸이타이당으로선 향후 누군가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일단 보수 정당들은 “왕실모독죄를 고치려는 정당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전진당의 경우, 연정 구성과 관련해 공식적으론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의 핵심 의제를 두고 선거 과정에서 이견을 드러낸 정당과 한배를 타려 할 가능성이 크진 않아 보인다. 현 시점에서 왕실모독죄 개정에 선뜻 찬반 의견을 내놓기가 힘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패통탄 후보가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채 미적지근한 답변을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총선이 끝난 뒤 왕실 개혁 문제가 연정 구성의 변수가 될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수나이 파숙 휴먼라이츠워치 태국 선임연구원은 “왕실모독죄가 태국의 새로운 정치 단층선이 됐다”고 짚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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