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가 ‘산소 같은 남자’라 표현한 정치인은?… 상사맨에서 ‘정치 9단’까지[황형준의 법정모독]

황형준 기자 2023. 5. 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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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박지원 전 원장과 부인 고(故) 이선자 여사의 신혼 시절. 사진 출처 박 전 원장의 이 여사 추모집 ‘고마워’


“방송에선 얘기를 못 하는데… 내가 돈을 많이 줘보기도 하고 받기도 해봤는데 돈 센다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안 나와~(웃음)”
- 취재 메모 중 -



올 3월 사석에서 만난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하 박지원)은 지난해 12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체포동의안 통과를 요청하기 위한 국회 본회의 발언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당시 한 장관은 “구체적인 청탁을 주고받은 뒤 돈을 받으면서 ‘저번에 주셨는데 뭘 또 주냐’ ‘저번에 그거 제가 잘 쓰고 있는데’라고 말하는 노 의원의 목소리, 돈 봉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도 그대로 녹음돼 있다”고 했는데 이를 반박한 것이다.

박지원 이야기를 이 발언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경험과 연륜, 정치 현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분석력, 타고난 유머와 재치, 솔직하지만 노회한 정치인이라는 평가 등의 이미지가 그대로 묻어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증인’이다. 박지원은 현재까지 4선 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국정원장 등을 지냈다. (아직도 그의 이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전남 진도 출신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불리는 그는 81세의 고령임에도 여전히 건재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최고수 중 하나로 꼽힌다.

자고로 일찍부터 그를 중용한 DJ는 그를 이같이 평가했다. 1996년 박 전 원장이 발간한 저서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발간 축사에서다.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박지원 대변인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의 최고 덕목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생김새와 언변과 문필력, 판단력이 모두 잘 어우러지면 어느 분야에서든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법인데, 박 대변인이 그런 정치인이다…소신과 원칙에도 강한 박 대변인이다. 그러면서도 유연함과 해맑은 미소를 늘 잃지 않는다. 누가 박 대변인을 ‘산소 같은 남자’라고 해서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중 -



‘산소 같은 남자’란 1990년대 히트를 친 배우 이영애 씨가 나오는 아모레퍼시픽의 ‘산소 같은 여자’ TV 광고에서 따온 표현으로 보인다.



● 중학생 때부터 박지원의 꿈은 ‘야당 총무’

박지원 전 원장과 부인 고 이선자 여사의 신혼 시절. 사진 출처 박 전 원장의 이 여사 추모집 ‘고마워’
‘진도 섬놈’ 박지원은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 박종식 선생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바다가 친구이자 놀이터였고 육지를 동경하는 섬 소년으로 자랐다. 늑막염을 앓아 건강이 좋지 않았다.

밀양 박씨 집안 어른 중에 국회의원이 있었고 가까이서 본 그는 정치의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부터 장래 희망은 국회의원이었고 중학교 때부턴 ‘야당 총무’(현 야당 원내대표)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우리 반 친구 중 한 놈이 나처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한 번은 그 친구가 내게 한 가지 내기를 제안했다. 누가 현직 국회의원의 이름을 더 많이 써내는지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그 친구는 100명 정도를 썼고, 나는 150명 정도를 써내 이긴 기억이 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중 -



박 전 원장은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공부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목포 문태고를 다니다 대입에서 떨어져 광주에서 재수를 했지만 당시엔 부인 이선자 씨를 만나면서 연애에 빠졌다. 단국대 경영대에 입학한 뒤로는 이전과 달리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 후 군대를 다녀온 뒤 어려운 취업문을 뚫고 ‘LG그룹’ 계열사였던 당시 반도상사(현 LX인터내셔널)에 취직했다. 그는 맡은 바 임무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처리했고 성실성을 인정받아 미국지사로 발령받았다고 한다.

미국지사에서 근무하던 중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친형이 미국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형님이 회사 생활에 재미를 못 느끼고 있던 그에게 사업을 권유하며 사업자금을 대준 것이다. 뉴욕에 사무실을 내고 처음 가죽 수입을 시작했지만 돈만 날렸다. 대신 실패를 딛고 가발 수입을 시작했다. 새벽에 집을 나와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 소변을 종이컵으로 받아둘 정도로 악착같이 일했다.

유행에 민감한 패션산업이었기에 유명 패션쇼나 헤어쇼, 그리고 뷰티숍을 두루 살펴보며 트렌드를 파악했다. 수요를 정확히 파악한 덕분에 사업에 성공해 날로 번창했다. 뉴욕 맨해튼에 건물 몇 채를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다른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의 오랜 꿈인 국회의원이었다. 미국에서 그냥 돈만 벌어 한국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당시 교민들은 미국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한인회 일을 거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종의 정치 연습으로 뉴욕 한인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게 됐다. 15대 뉴욕 한인회장에 출마했지만 낙마했고 2년 뒤 역대 최연소 회장이 됐다. 그 뒤 교민사회에서 뉴욕 한인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1981년 8월 미주 한인 총연합회에서 98개 한인회장의 만장일치로 총연합회 회장에 당선됐다.

● 전두환 동생 전경환과 DJ 사이… 뒤바뀐 박지원의 ‘운명’

1992년 6월 19일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창립 3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한 김대중 당시 민주당 대표(가운데)와 그 왼쪽에 있는 박지원 전 원장. 동아일보DB
총연합회장을 맡던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와 가깝게 지냈다. 전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 환영위원장을 맡았고 그 일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수많은 양심적인 인사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전 씨는 그의 정계 입문을 도와주려고 애썼고 여당인 민정당의 전국구 의원 입성을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이 해외 동포에겐 전국구를 줄 수 없다는 지시를 내리면서 무산됐다. 미안했던 전 씨는 엄청난 이권이 있는 사업을 제의했지만 바로 거절했다. 그가 그때 민정당 의원이 됐거나 사업을 챙겼더라면 아마 지금의 박지원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잘못된 행동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얼마 뒤 김대중 선생을 만나면서 심각한 인간적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중 -


박지원의 운명이 바뀐 건 뉴욕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하던 김경재 전 의원의 소개로 망명 중이던 DJ를 만나면서부터다. 1983년 5월이었다. “절대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돼 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민주화가 온다”는 등 DJ의 말에 감명을 받은 박지원은 무릎을 꿇고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라고 참회했다. 첫 만남 이후 그는 김대중 사단의 말석에 자리 잡게 됐고 DJ가 하던 인권문제연구소 일을 돕고 국내에서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DJ의 메시지를 전하는 ‘밀사’역 등을 맡았다.

이는 ‘일급비밀’이었다. DJ의 최측근인 권노갑 고문조차 그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박지원은 고향인 전남 진도위원장을 맡았다. 권 고문도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굴러온 돌”로 여기고 이를 반대했다. 미국에서 맺어진 DJ와 박지원의 관계를 모르던 권 전 의원의 입장에서 보면 옳은 진언이었다. 이후 권 고문이 처음 미국을 방문할 당시 미국에 있던 박지원을 만났다. 권 고문은 “이번에 미국 오기 전에 동교동에 들렀더니 사모님과 총재께서 미국 가면 꼭 박 회장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소. 그러면서 그간 박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소”라며 손을 꽉 잡고 “전에 정말 미안했다”며 몇 번이나 사과를 했다고 한다.

“오십이 넘어야 관운이 풀린다”는 이야기를 사주가들에게 들었던 박지원은 실제 3수 끝에 전국구 의원이 됐다. 대입에서 재수한 것을 합쳐 “내 인생은 오수(五修)”라는 게 그의 말이다.

1984년엔 야당인 신민당에서 전국구(현 비례대표) 의원직을 제의받았으나 당선권 순번을 받기 어려울 것 같아 거절했다. 선거 결과는 당선권이었다. 첫 번째 실패였다. 미국에서 들어온 뒤 진도위원장과 총재 언론특보 등을 맡았지만 1988년엔 지역구가 통합되면서 출마가 좌절됐다. 전국구로 출마하기로 했지만 마지막에 DJ가 다른 인물에게 자신에게 주겠다던 전국구 순번을 줘 기회가 없었다. 다시 4년 뒤에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 21번으로 간신히 당선됐다. 그의 나이 만으로 50세였다.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DJ의 지근거리에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특히 1992년에 그는 수석부대변인을 맡아 4월부터 12월까지 매일 오전 6시 10분이면 동교동에 도착해서 DJ와 함께 하루종일 선거운동을 했다. 기자들과 ‘떡’이 되도록 폭음을 한 이틀을 빼곤 하루도 그 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선을 열심히 뛰었지만 결과는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승리로 끝났고 DJ는 다음 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DJ 대통령을 만들려던 박지원에겐 눈앞이 깜깜한 순간이었다.

● 몸으로 때운 ‘독설’ 명대변인…“부활한 예수님, ‘기자들 왔냐’고 물을 것”

“나는 본변인이 아닌 대변인이니 좀 봐주시오. 큰 정치 하는 분들이 그깟 대변인의 말에 신경을 써야 되겠느냐.”

‘대변인 박지원’은 간혹 자신이 논평에서 비판한 당사자가 직접 전화를 해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항의하면 이같이 달랬다고 한다. 일부 논평에 인신공격성이나 조롱이 들어가는 등 센 논평을 낸 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수준 이하”라거나 “보좌관이 쓴 것을 읽기만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대변인 명의 논평은 그가 직접 썼다고 한다.

그는 1992년 대선에선 YS가 재산을 공개했을 때 “머리부터 공개하라”며 공격했고 TV 토론을 거부하자 “연설 때 사용하는 원고를 가져와도 된다”고 비꼬았다. 항간에서 DJ에 비해 YS가 덜 총명하다는 지적을 겨냥한 것이었다.

또 1994년 당시 박찬종 신정치개혁당 대표가 DJ의 정계복귀론에 대해 비판하자 “연탄가스는 틈만 있으면 비집고 나와 인체에 해만 주고 있는데 박 대표도 틈만 있으면 비집고 나와 야당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5년 11월엔 당시 민자당이 당명 개칭을 추진하자 “호적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다. 민자당은 이름을 바꾸어도 대통령이 되기 위해 야합했던 김 대통령과 민자당 그 이름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국민은 기억할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변인 성명이 개떡 같더라도 기사는 찰떡같이 써 주시오”라고 기자들한테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당의 언론 정책이 맘에 들지 않을 때는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면, 가장 먼저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기자들 왔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 시절부터 박지원을 오래 지켜본 한 인사의 말이다.

“DJ가 여러 장점을 가진 지도자지만 기준이 높아 모시기 어려운 지도자다. 성실함과 집중력을 요구하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는 사람은 곁에 안 둔다. 그 기준에 부합하는 게 박지원이고 내가 본 사람 중에 그만큼 순발력이 있고 성실하고 집중력이 있는 사람이 없다. 그 시절 낮밤으로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면서도 매일 아침 일찍 DJ가 있던 일산과 청와대로 출근했다.”
- 취재 메모 중 -


1996년 박지원은 부천 소사에 출마하며 재선에 도전했다. 상대는 신한국당 후보였던 김문수 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저서도 1996년 총선을 앞두고 발간됐는데 이를 두고 ‘넥타이’ 공방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동운동가 출신에서 여당 신한국당의 후보로 변신한 김 위원장이 먼저 ‘아직도 나는 넥타이가 어색하다’라는 책을 냈는데 이후 박지원이 이 같은 제목의 책을 내자 김 위원장 측에서 ‘저격용’이라고 반발한 것이다. 박지원은 전에도 “넥타이를 제법 잘 맨다는 보도가 있었다”고 반박했지만 김 위원장은 박지원을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고배를 마셨다. 당시 그를 향해 좌익이라고 공격하는 등 색깔논쟁, 용공몰이를 한 탓도 컸다.

●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대(代)통령’이라는 말까지 회자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 인수위 대변인 시절. 동아일보DB


낙선한 뒤에도 박지원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DJ의 특보 등을 맡았다. DJ는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DJP연합을 성사시키며 결국 대선에 성공한다.

박지원은 당선자 대변인,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거치며 DJ를 대리해 대북특사를 다녀와 6·15 남북정상회담 성공에 기여했다.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오르며 명실상부한 DJ의 ‘2인자’로 자리잡았다.

여기에는 DJ의 기존 가신그룹인 ‘동교동계’가 2선으로 물러나면서 그가 빈자리를 메우게 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동교동계는 1997년 대선 직전에 선출직을 제외한 임명직은 맡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고 2000년 12월 좌장인 권 고문은 정동영 당시 최고위원으로부터 2선 후퇴를 요구받고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DJ의 심복이지만 동교동계와는 약간 이질적인 그가 전면에 나서게 됐고 권력이 쏠리게 된 것이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는 이야기도 많았고 시기와 질투, 미움도 많이 받았다.

김창혁 전 동아일보 기자와 권 전 고문이 쓴 권노갑 회고록 ‘순명’에는 박지원에 대해 이 같은 비화가 나온다.

18대 총선을 앞둔 2008년 초, 전남 무안으로 향하는 권노갑의 승용차 안. DJ의 차남인 김홍업 의원의 선거를 돕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권노갑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DJ였다.
“무안 가는 김에 목포도 좀 다녀오소.”
김홍업 지원 유세를 마친 다음 목포에 가서 박지원도 좀 도와주고 오라는 말이었다.
“무안은 가겠지만 목포는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 권노갑 회고록 ‘순명’ 중 -


DJ의 ‘외유 권유’를 물리치자 박지원이 DJ의 뜻을 직접 전한 것, 2002년 4월 ‘진승현 게이트’에 권 전 고문이 연루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권 전 고문은 박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이 같은 내용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는데 알고 있었지만 이를 전달하지 않은 것 등 일련의 과정에서 권 전 고문도 적지 않은 서운함을 품었던 것이다.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내면서는 ‘대신할 대’자가 붙은 ‘대(代)통령’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항상 처신에 유의하고 몸조심을 했지만 미움을 받았다. 언론사 인사에 개입하거나 언론사 세무조사를 그가 기획했다는 의구심과 논총을 받으면서 그의 전문 분야이자 동반자였던 언론들도 일부 등을 돌렸다.

‘태양에 가까우면 타죽을 수 있다’는 말처럼 권력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박지원도 DJ 정부가 끝난 뒤 갖은 고초와 수난을 겪게 된다. 이 또한 그의 운명이었다.



기자 초년병 때인 2009년경 어딘가 술자리에서 들었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었습니다. 박지원 전 원장이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 여배우 C 씨와 염문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근 박 전 원장에게 물었더니 “전혀 사실무근이다. C 씨는 본 적도 없다”며 웃었습니다. 근거가 없는 ‘찌라시’인지 유사한 사건이 와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박 전 원장이 현재까지 낸 책은 딱 두 권입니다. 2018년 10월 부인 고 이선자 여사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뒤 추모집으로 발간한 ‘고마워’가 가장 최신입니다. 책까지 낼 정도로 ‘사랑꾼’인 그에게 과거 저런 소문이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권은 1996년에 발간된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였습니다. 2019년 무렵 의원실에 부탁해서 복사본으로 구해 읽었던 책입니다. 이번 편의 상당 부분은 그 책에 의존했습니다. 저 역시 기자로서 그 시절을 직접 겪지 못했고, 27년 전 씌어진 데다 절판된 지 오래여서 독자분들도 새롭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 전 원장에게 1996년 이후 자서전을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DJ와 관계된 얘기를 안 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매일 TV와 라디오, 유튜브 등에 매일 4번 안팎 출연해 일각에선 “DJ 장사를 그만 좀 해라”라는 말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DJ에 누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자제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권력의 핵심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자리지만 원래 미움을 많이 받는 자리입니다. 동전의 양면입니다. ‘대(代)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던 그도 영욕의 세월을 겪었습니다. 다음 [18화]에선 그의 노무현 정부 시절 이후를 다루겠습니다. 그가 산소 같은 남자인지 연탄가스(일산화탄소) 같은 남자인지는 후속을 보고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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