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과거사 전향적 결단에 기시다 대승적 화답… ‘큰 진전’ 위한 ‘작은 一步’ [Deep Read]
일본 내 ‘강제징용 사과 불가論’ 강하지만… 日 총리, 압박 극복하고 ‘3종 외교세트’로 진정성 보여
尹 3월 訪日 이어 전광석화 같은 기시다 訪韓으로 셔틀외교 전격 복원… ‘반일-혐한’ 악순환 끝내야
한·일관계의 정상화 과정에서 최대 걸림돌은 과거사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전향적 해법을 제시하면서 최악의 한·일관계에 물꼬가 터졌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이에 화답하면서 셔틀외교도 정상화됐다.
기시다 총리가 일제 당시 징용공 출신을 염두에 두고 “마음 아프다”고 한 것이 구체적인 사죄와 반성은 아니지만, 그의 방한과 한·일 정상회담 결과는 ‘윤 대통령의 전향적 결단에 대한 기시다 총리의 대승적 화답’으로 해석돼야 한다. 기시다 총리는 한국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해 강제징용·원폭희생자 위령비 참배·후쿠시마(福島) 오염수 시찰 관련, ‘3가지 외교세트’로 화답했다. 기시다 총리가 극히 어려운 국내 정치적 환경을 이겨내면서 보따리를 풀었다는 점에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최소한의 진정성이 엿보인다.
◇일본의 정치환경
기시다 총리는 윤 대통령이 방일했던 3월을 전후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한국에 과거사 문제에 대한 직접 사과를 포함한 유화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정치환경에 놓여 있었다. 우선 기시다를 총리로 옹립하는 데 역할을 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아베파는 “사죄와 반성은 안 된다”는 대한 강경 입장을 고수했고, 이 기조를 기시다 총리가 허물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상황이었다. 자민당 내에서는 일본이 한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다른 요구조건으로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인식도 팽배했다.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추이여서 선거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4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그의 정치 상황은 더더욱 어려웠었다.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할 경우 자민당 내 ‘기시다 하야’ 작업이 본격화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제약 요건으로 인해 기시다 총리는 한국이 기대하는 ‘물컵의 반 잔’을 채우기에 소극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지금까지 한·일관계 역사를 보면 사죄와 반성은 한국의 지속적인 요구에 일본이 마지못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우공이산의 마음으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면서 한 걸음씩 내디딘 결과, 일본은 식민지시대를 반성하는 역사 인식을 갖게 됐다. 그것이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이라는 역사 인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내각의 망언, 역사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 등에서 나타난 지도부의 언행은 일본의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시시포스의 형벌’과 같은 무한 돌 굴리기가 되풀이됐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역사 피로감’은 더 이상은 사죄와 반성이 없다는 아베 전 총리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국이 원하는 사죄와 반성을 내놓기 어렵게 된 배경이다.
◇기시다, 고민과 결단
기시다 총리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 한국과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사죄·반성 표명이 필요하다는 점도, 일본이 기존 입장만을 되풀이하면 한·일관계가 더욱 악화할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로서는 윤 대통령의 전향적 결단과 해법에 화답하지 못한다는 외교적 부담감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민당 내 비둘기파인 ‘고치카이(宏池會)’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윤 대통령과 함께 새로운 한·일 시대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
결국 기시다 총리는 과거사와 관련해 한국 여론은 물론 일본 국내 여론까지 동시에 배려하는 발언을 하는 안을 검토했고, 방한을 추진했다. 기시다 총리가 ‘관저(官邸) 주도’로 발 빠르게 움직인 결과, 윤 대통령 방일 52일 만인 5월 7일 전격적으로 한·일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서는 6개월 이상 준비를 해온 일본의 관행에 비춰 엄청난 속도감이었다. 이로써 12년 만에 한·일 셔틀외교가 복원됐다.
기시다 총리 방한을 정치적 계산과 미국의 압력으로만 해석하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즉 G7 정상회담 이전에 지지율을 올려 선거전에 이용하려는 전략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한·일관계 개선이 일본 내에서 여전히 정치적 리스크가 된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미국의 압박설도 과거사에 대한 미국의 개입 불가 방침으로 볼 때 신빙성이 없다. 52일 만에 셔틀외교가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윤 대통령의 전향적 결단에 대승적으로 보답하려는 기시다 총리의 의지가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3종 외교세트
기시다 관저는 지난 7일 한·일 정상회담 때 한국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한 ‘3종 외교세트’를 가져왔다. 첫째,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 “당시 가혹한 환경 속에서 많은 분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한 것에 대해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고 표명했다. 본격 사과까지는 아니었지만 지난 3월 양국 정상이 만났을 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일본 정부의 입장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면서도 “총리 개인의 생각”이라며 “마음 아프다”고 표현함으로써 한국 측에 다가섰다.
둘째, 히로시마(廣島)에 있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윤 대통령과 함께 추모하겠다면서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약속했다. 원폭 위령비는 재일 한국인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피해자추모장소다.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일본 총리가 한국 대통령과 함께 참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다.
셋째, 후쿠시마 오염수(일본은 ‘처리수’)에 대해서도 한국의 전문가 사찰단을 받아들였다. 기시다 총리는 “일본 총리로서 자국민 및 한국 국민의 건강이나 해양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형태의 방출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한국을 배려했다. 투명한 절차를 통해 정보 공유를 시작하고 과학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게 됐다.
한·일관계 개선은 ‘작은 일보’가 쌓이고 또 쌓여 궁극에는 ‘거대한 진보’를 일궈가는 과정이다. 이번 기시다 총리의 3가지 외교세트 속에 담긴 한·일관계 개선 의지는 새로운 형태의 ‘일보 진전’으로 평가될 만하다.
◇악순환의 고리 끊기
과거사 문제는 늘 한·일 양국의 정치권에서 ‘반일’ 혹은 ‘혐한’을 부추기는 재료가 될 수 있는 만큼 앞으로도 많은 진통이 있을 것이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번 한·일 셔틀외교 복원은 과거사를 둘러싼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이 담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일본은 한국이라면 반대하고, 한국은 일본이라면 비판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양국 관계의 밝은 미래는 오지 않는다.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가면서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내용을 채워나가야 한다.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 전 현대일본학회 회장
■ 용어 설명
일본의 ‘관저(官邸)’란 한국으로는 과거 청와대, 현 대통령실 같은 역할을 하는 곳. ‘관저 주도’는 곧 관저가 집중된 권력을 갖고 톱 다운으로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이름.
‘고치카이’, 즉 굉지회(宏池會)는 자민당 내 가장 오래된 파벌. 이케다파에서 시작해 오히라·스즈키·미야자와파 등을 거쳐 기시다파로 이어져. 출신 기반은 주로 히로시마·교토·후쿠오카현 일대.
■ 세줄 요약
일본의 정치환경 : 한·일 관계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시시포스의 형벌’ 같은 돌 굴리기를 되풀이. 일본은 ‘역사 피로감’으로 “더 이상 사죄·반성은 없다”는 여론 강해져. 기시다 총리는 이런 정치환경에 둘러싸여.
기시다, 고민과 결단 : 기시다 총리는 새로운 한·일 시대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했음. 고민과 결단 끝에 ‘관저 주도’로 움직여 전격 방한 추진해 3종 외교 세트 내놔. ‘윤 대통령의 전향적 결단에 대한 대승적 화답’임.
악순환의 고리 끊기 : 셔틀외교 복원은 ‘작은 일보’가 쌓여 궁극에 ‘거대한 진보’를 일궈가는 과정. 셔틀외교로 한국의 무조건적 ‘반일’과 일본의 무분별한 ‘혐한’을 이겨내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미래로 나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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