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 유토피아 꿈꾸는 젠박 작가 “컬러 조각으로 만들어가는 무한한 세계”
젠박 작가의 작품에는 절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감정은 오직 컬러로 눌러 담고 파스텔 톤의 담백한 색으로 동시대적 감성을 표출한다. 명암을 최소화해 심플하고, 과감하게 그어 완성한 선과 면은 ‘용감한’ 그의 성격을 닮았다. 최근 매진하고 있는 터프팅에는 원색적인 색감과 입체감까지 더했다. 다양한 미술적 요소들을 고유의 감각으로 엮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젠박. 그가 세상을 관찰하고 붓을 쥐는 이유에 대하여.
그동안 매번 타이밍이 안 맞았는데, 올해는 주제가 '드림 인 풀 컬러(Drean in full colour)’라는 말을 듣고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어요. 주로 컬러를 통해 영감과 작품을 표현하기 때문에 꼭 참여하고 싶었거든요. 경쟁률이 높다는 소식에 긴장도 했죠. 다행히 발탁됐다는 연락을 받았고 뛸 듯이 기뻤어요. 미술제 안에 내 작품만 걸어놓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생겼으니까요.
갤러리 소속으로도 참여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화랑미술제는 갤러리 부스로 나눠 운영해요. 갤러리에 속한 작가들만 참여할 수 있죠. '줌-인’은 갤러리 소속 없이 개인으로 참여할 수 있어 경쟁률이 정말 치열해요. 미니 개인전을 열어주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많은 작가가 욕심을 내는 걸로 알고 있어요.
생활 패턴은 어떤가요. 자유로운 편인가요.
아니요. 계획적인 걸 좋아해요. 작품 역시 마찬가지고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 단계적으로 완벽하게 준비를 해놓아요. 세팅이 안 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하면 흥미가 떨어지는 편이거든요. 작업을 일종의 수행 과정이라고 생각해서 그림 그리는 시간을 루틴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어요.
작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하나요.
산책하는 걸 좋아해서, 걸으면서 새로운 사물체를 발견하면 사진으로 남겨둬요. 작업하고 싶은 사진이 있으면 스케치북에 러프하게 밑그림을 그리죠. 그 그림들을 하나씩 잘라 인형 놀이를 하듯 위치를 바꿔가며 구성을 잡아요. 완성되면 메인 컬러를 정한 후 어울리는 나머지 색을 조합해놓고 완벽하게 일러스트 작업을 해둡니다. 일러스트를 따라 선과 면, 색으로 캔버스를 채워요. 제 모든 작품은 이 과정을 통해 완성돼요.
작업 이야기를 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지네요.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웃음). 그만큼 또 열심히 재미있게 하고요. 반면에 싫증 나면 빨리 포기해요. 대학 졸업 후 큐레이터가 되고 싶어 싱가포르에 있는 대학원에서 아시아권 미술사 공부를 했을 때도 그랬어요. 호기롭게 갔지만 공부 자체가 지루하고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1년도 안 돼 미국으로 돌아왔죠.
미국에서 미술을 시작한 건가요.
유년 시절을 거의 미국에서 보냈어요. 동생이 다니는 미술학원에 따라갔다가 원장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했죠. 당시 18세였어요. 남들보다 늦었다는 생각에 더욱 악착같이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요. 겨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입시를 준비했고 운이 좋게 코넬대학교 파인아트학과에 입학했어요.
패션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졸업 작품으로 평소 신고 싶은 신발을 이미지화 한 뒤 실제 발 사이즈로 제작해 벽에 블록처럼 붙여놓았었어요. 전문적으로 패션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고요. 싱가포르에서 미국으로 돌아올 때 기회다 싶었고, 패션이 저와 잘 맞는지 빠르게 확인하고 싶어서 파슨스대학교 어소시에이트 디그리(Associate Degree·2년제 대학 졸업생에게 수여되는 학위) 과정에 입학해 패션 디자인 공부를 했어요. 캐롤리나헤레라, 잭포즌, 오스카드라렌타 등에서 인턴 생활도 했고요.
고객이 좋아하는 옷 위주로 만들어야 하는 게 싫었어요. 내 취향을 우선시하고 싶었거든요. 이론 공부를 하거나 실제 옷을 제작할 때도 항상 고객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게 힘들었죠.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파슨스대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패션을 꾸준히 할 자신이 없어 포기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감각을 100% 반영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이 모든 것의 교집합은 '미술’뿐이었죠.
조립과 해체를 통해 완성한 나만의 도시
매 작품은 레고를 모티프로 한 건물과 집들이 주를 이뤄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어렸을 때부터 레고를 좋아했어요. 과정은 정교하고 복잡하지만 매뉴얼을 따라 조립하면 그럴싸한 결과물이 완성되잖아요. 특히 실제 존재하는 빌딩을 모티프로 한 카테고리를 좋아했어요. 레고로 빌딩 조립을 끝내면 수채화로 완성된 건물을 그려놓아요. 그리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하죠. 나아가서는 완성된 레고에 제가 살았던 도시의 건물들을 대입해봤어요. 확대, 축소, 결합, 분해 등 다양한 과정을 거쳐 저만의 건물을 다시 완성하죠. 그리고 그 건물들로 채운 새로운 도시를 머릿속에 그려나갔어요. 하다 보니 선과 면, 컬러를 입혀 좀 더 완벽하게 완성하고 싶은 갈망이 생겼고, 그걸 캔버스 위에 하나하나 꺼내놓았어요. 제 작품 속 건물들은 모두 질서 있게 쌓여 있어요. 이 부분 역시 블록을 차곡차곡 쌓아야 결과물이 완성되는 레고에서 영감을 받았죠.
맞아요. '레고스케이프’에는 3가지 뜻이 섞여 있어요. 레고(lego), 도시경관(cityscape), '벗어나다, 도망치다’라는 뜻의 escape. 제 작품은 레고로부터 시작되고, 레고스케이프를 통해 새로운 건물을 만들면서 가상의 도시를 완성해나가고 있거든요. '레고스케이프’의 모든 작품은 이 가상 도시의 단편적인 부분들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작가님 작품 하면 감각적인 컬러 매칭을 빼놓을 수 없어요. 타고난 건가요.
대학 졸업 때까지는 흑백 작업만 했어요. 당시에는 '컬러가 안 어울리면 어떡하지’라는 압박감이 너무 컸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색을 멀리하기도 했고요. 이 두려움이 깨진 게 패션 브랜드 인턴십 생활을 하면서부터예요. 패브릭에 어울리는 신발이나 단추 색을 찾는 게 주 업무였거든요. 하다 보니 컬러를 다루는 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전혀 매칭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컬러들이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면 짜릿하더라고요.
주로 단색을 사용하는 것 같아요.
심플하고 깨끗한 이미지 덕분에 단색만 사용한다고 오해하시는 분이 많아요. 제 작품에 사용된 색은 대부분 여러 컬러를 믹스해서 완성한 것이에요. 자세히 보면 다양한 컬러가 섞여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또 작품의 주제나 전시회 환경, 성격을 반영해 색을 유기적으로 바꾸기도 하고요. 색을 일부러 단순하게 사용하지는 않아요. 기획 자체를 컬러에 두진 않거든요. 그림을 이루는 구성 요소에 차별화를 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어난 결과인 것 같아요.
작품들의 공통점이라면 '단순함’과 '질서’인가요.
요즘 다양한 재료를 결합한 작품이 많이 등장하고 있어요. 하지만 단순함의 매력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림이 심플하면 집중도가 더 높아지고, 컬러들을 균형감 있게 보여줄 수 있죠. 이런 심플한 작품에는 주로 색의 강약 조절로 감정을 표현하는데, 이 부분이 정말 재미있어요. 제가 단순함에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또 우리가 사는 공간은 한정돼 있죠. 집 안, 차, 캔버스도 그렇고요. 이 한정된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 작업물에서는 사물체를 질서 있게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안정감을 표현하고 있어요.
작가들마다 자기만의 강박을 안고 살아가더라고요.
원래는 컬러가 스케치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걸 못 봤었어요. 삐져나온 부분이 있다면 몇 번이고 덧칠해서 완벽하게 수정했죠.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이런 강박을 자연스럽게 벗어나게 된 것 같아요. 당시에는 누구를 만나지도, 밖을 자유롭게 나가지도 못하니 매일이 너무 갑갑하더라고요. 작업할 때만이라도 좀 더 자유로워지자는 생각에 강박처럼 느껴졌던 부분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았죠. 조금 삐져나오거나 흐트러진 컬러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식으로요. 완성해놓고 보니 이런 부분들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러프한 매력으로 다가왔죠.
한국 관객 중에는 작품을 분석해서 블로그나 SNS에 올리기도 해요. 작가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경우도 있고요. 작가로서 경험한 한국 관객만의 특성이 있나요.
전시회 자체를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대부분 작가나 작품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갤러리를 찾아오시더라고요. 관객들이 SNS로 보낸 메시지를 보면 작품 구입 절차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이에요. 좋았다, 별로였다 등 작품의 느낌을 전달해주시는 분은 거의 없죠. 전시회는 결코 어렵고 진지하지 않아요. 작품을 통해 행복감과 감동을 느꼈다면 그 자체로 대만족이에요. 전시회를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즐기시면 좋겠어요.
재료비가 만만치 않죠. 저는 보통 미국에서 재료를 사 오는 편이에요. 한국보다는 저렴하거든요. 대용량을 주문하면 더욱 싸게 살 수 있고요. 미국 온라인사이트 딕블릭(www.dickblick.com)도 자주 애용해요. 요즘은 세계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사이트도 많아졌어요. 저는 주로 아트시(www.artsy.com)를 찾고요. 나라마다 작가들이 분류돼 있고, 작품을 구입할 수도 있어 자주 찾고 있어요.
해외에서 한국 아트 신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한국 작가 입장에서 느끼는 바가 궁금해요.
해외 아트페어로부터 관심을 많이 받는 건 사실이에요. 그 이유가 한국 작가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기생충’ '미나리’ 등의 한국영화가 세계에서 인정받았고, K-팝은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됐죠.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에요. 흐름상 이제는 한국 예술 차례가 된 것 같아요. 한국 예술의 세계적인 발전은 한국의 신진 작가뿐만 아니라 미술시장 전체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 않을까요.
한국 아트 신이 해외에 알려지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어요.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기성세대든 젊은 세대든 페어 그 자체가 많은 작가를 알리는 기회의 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 장을 통해서 작가들의 노력과 가치, 감각을 인정받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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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조영철 기자 젠박
정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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