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외국 선수 감별사’ 주태수 국원초 코치, “농구는 애증입니다”

손동환 2023. 5. 1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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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3년 4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3월 10일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국내 선수와 외국 선수의 차이는 크다. 가장 큰 차이는 피지컬과 운동 능력이다. 그래서 국내 선수가 외국 선수를 막는 건 어렵다. 보통 이상의 투지와 체력을 필요로 한다.
10년 전에는 더 그랬다. 그런 시절에 ‘외국 선수 감별사’로 불린 이가 있었다. 주태수다. 무릎 부상으로 은퇴한 주태수는 대학 팀 코치와 프로 팀 전력분석원 등 많은 보직을 경험했다. 지금은 충주 국원초등학교에서 한국 농구의 미래들과 함께 하고 있다. 여러 경험을 했던 주태수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어떻게 돌아봤을까?

피지컬과 투지를 겸비한 빅맨
신일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주태수는 탄탄한 체격 조건과 궂은일에 능한 빅맨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2005년 연세대와 정기전에서 인생 경기를 펼쳐, 전력 열세였던 고려대를 승리로 이끌었다. 자신의 주가를 더 끌어올렸다.
가치를 인정받은 주태수는 2006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 나왔다. 전체 5순위로 프로에 입성했다. 센터 포지션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 무대를 밟았다. 주태수의 행선지는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 데이원스포츠)였다.

2006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5순위로 프로에 입성했습니다.
제가 드래프트에 나섰던 시기가 빅맨들에게는 좋지 않았을 거예요. 외국 선수 제도가 자유계약으로 바뀌면서, 피트 마이클 같은 뛰어난 선수들이 KBL로 입성했거든요. 그래서 제 순위도 생각보다 밀린 것 같아요.
그렇지만 프로 무대를 밟는다는 건 저한테 영광이었어요. 또, 제가 좋아하는 팀인 오리온스로 가서 너무 좋았어요. 아쉬움보다 좋았던 기억이 더 많았죠.
오리온스를 좋아한 이유는 어떤 거였나요?
친한 선배님들이 많았고, (김)병철이형(전 고양 오리온 코치)과 (김)승현이형(전 SPOTV 해설위원) 등 화려한 컬러를 자랑하는 선수도 많았어요. 또, 제 포지션이 빅맨이라, 승현이형이라는 최고의 가드와 뛸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오리온스 농구단의 첫 인상은 어떻던가요?
당시 숙소가 용인 백암에 있었어요. 그런 시골을 처음 가봤어요.(웃음)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별이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팀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제가 다녔던 고려대와 너무 다른 문화여서, 새로운 것도 많았던 것 같아요.

외국 선수 감별사
주태수는 2006~2007시즌부터 프로 무대에서 뛰었다. 그렇지만 프로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2012~2013시즌에도 경기당 20분 42초 밖에 나서지 못했다. 당시 기록은 평균 5.6점 4.0리바운드(공격 1.3)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태수는 꼭 필요한 선수였다. 특히,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로 이적한 후, 탄탄한 피지컬과 자신만의 노하우로 상대 외인 빅맨을 잘 제어했다.
주태수의 수비가 상대 외국 선수의 공격력을 판단하는 척도였다. 주태수가 막지 못하는 외국 선수는 리그 정상급 외인이었고, 주태수가 잘 제어하는 외국 선수는 교체 대상으로 언급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주태수는 ‘외국 선수 감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6~2007시즌부터 두 시즌 동안 오리온스에서 뛰었습니다. 프로와 대학의 차이가 컸을 건데요.
한 시즌은 정말 깁니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관리하기 어려워요. 저 역시 몸 관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죠. 무엇보다 프로 선수와 대학 선수의 기량 차이가 큽니다. 또, 잘하는 외국 선수들이 당시에 많았기 때문에, 더 높은 벽을 실감했어요.
여담이지만, 피트 마이클과 뛰어보셨잖아요.
피트 마이클을 처음 봤을 때, 머리부터 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했더라고요.(웃음) 동료들끼리 “전부 다 이태원에서 산 거 아냐?”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죠. 그때만 해도, 피트 마이클이 어떤 선수인지를 몰랐기에, 그런 인식을 가졌던 것 같아요.
하지만 첫 경기 하자마자, 그런 인식이 사라졌어요. 다들 “얘는 진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요즘 말로, ‘어나더 레벨’이었죠.(웃음)
그리고 외국 선수들 간의 서열이 정해지면, 레벨 낮은 선수들이 레벨 높은 선수들에게 꼬리를 내려요. 그런데 피트 마이클은 어느 선수 앞에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어요. 그 정도로, 프라이드가 센 선수였어요.
2007~2008시즌 중반 전자랜드로 트레이드됐습니다.
대구 경기를 준비할 때였을 거예요. 같은 방을 썼던 승현이형이 경기 전날 김상식 감독님(당시 대구 오리온스 감독대행, 현 안양 KGC인삼공사 감독)과 저녁을 먹으러 나갔어요. 그리고 새벽 1시에 들어오셨는데, “너 트레이드될 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다음 날 경기(vs 안양 KT&G)를 위해 몸을 푸는데, 김상식 감독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경기 끝나고 트레이드 될 거다”고 하시더라고요.
감독님 말씀을 듣고 어벙벙했어요.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리니, 좋은 형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어요. 서로 간의 관계가 너무 끈끈했거든요.
또, 저희 팀이 연패 중이었는데, 그날 경기를 마침 이겼어요.(웃음) 끝나고 라커룸으로 들어갔는데, (성)준모형(현 울산 현대모비스 전력분석팀장)이 먼저 울더라고요. 저도 눈물이 터졌어요. 방송 인터뷰 때문에 나갔는데, 인터뷰 중에도 엄청 울었어요.
인터뷰 끝나고 나서, 창원으로 곧장 내려갔습니다. 전자랜드가 그때 창원으로 원정을 갔거든요. 최희암 감독님께서 저를 보시더니 “그렇게 오기 싫었냐?”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외국 선수를 잘 막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하니, 30살에 가까운 나이가 됐습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옵션을 생각했어요. 때마침 유도훈 감독님(현 대구 한국가스공사 감독)께서 생각지 못했던 저의 강점을 꺼내주셨습니다. 그게 외국 선수 수비였죠.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저 ‘한국 선수들이 외국 선수들한테 당연히 밀린다.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마인드를 싫어했습니다. 제 실력이 비록 외국 선수에게 밀릴지라도, 다른 거라도 이겨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전투적으로 임했어요. 그런 이유 때문에, 저와 매치업되는 외국 선수들이 저를 싫어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외국 선수 감별사’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한편으로는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기분 나빴어요. 하지만 저랑 친한 친구가 “‘외국 선수 감별사’는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별명이 아니다. 너가 외국 선수들을 귀찮게 했기 때문에, 너가 그런 별명을 얻은 거다”고 조언해주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저도 그 별명을 값지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부상 그리고
주태수는 어떻게든 버텼다. 그러나 외국 선수를 막다 보니, 체력 부담이 커졌다. 커진 체력 부담은 몸의 부하로 이어졌다.
부하를 겪은 주태수는 무릎을 다쳤다. 버텼지만, 쉽지 않았다. 좋지 않은 무릎 때문에, 장기인 수비도 하지 못했다. 2016~2017시즌 다시 한 번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더 이상 코트로 돌아오지 못했다.

커리어 하이 시즌 후 무릎을 다쳤습니다.
2012~2013시즌 종료 후 FA(자유계약)가 됐습니다. 계약을 마친 후(주태수는 당시 3억 원의 보수 총액으로 전자랜드와 재계약했다. 직전 시즌에 비해 100% 오른 금액), 2013~2014 시즌을 준비했죠. 중국 전지훈련 중, 상대 선수와 무릎을 부딪혔습니다. 오른쪽 무릎 내측 인대가 일부 손상돼서, 저 혼자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치료와 재활을 거쳤죠.
복귀를 했지만, 왼쪽 무릎을 삐끗했습니다. ‘운동량이 부족해서 그렇겠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3~4주 정도 보강 운동을 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오전에 패턴 훈련을 하다가, 또 한 번 다쳤습니다. 뒷걸음질하다가 무릎에 통증이 왔는데, 그때부터는 못 움직이겠더라고요. 병원에 가보니, ‘왼쪽 무릎 전방십자인대 파열’이라고 하더라고요. 곧바로 수술을 했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코트로 돌아왔지만, 부상이 재발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무릎을 다친 이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의학적으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통증이 가시질 않았어요. 그래서 팀과 마찰을 겪었고, 제가 유도훈 감독님에게 버릇없이 대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도훈 감독님께서는 저를 잡아주셨습니다. 몸 관리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해주셨어요. 또, 저의 책임감을 끌어올리기 위해, 저한테 주장을 맡기셨어요. 그래서 몸 관리를 더 철저히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한계가 왔습니다. 2017~2018시즌 도중 은퇴하셨는데요.
2016~2017 마지막 즈음에 무릎이 또 부었어요. 병원을 가보니까, 전방십자인대가 끊어져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은퇴 전까지는 수술하지 않겠다.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겠다”고 병원에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FA를 또 한 번 맞는 시기여서, 마음의 준비도 했습니다. 마침 고려대에서 코치 제의를 해줬어요. 은퇴할 수 있는 적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습니다. KCC도 제 상황을 양해해주셨어요.

은퇴 후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를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은퇴 후 여러 경험들을 했다. 먼저 2018년에는 모교인 고려대의 코치를 맡았다.
그러나 모교 코치 생활은 길지 않았다. 부산 KT(현 수원 KT)에서 전력분석원을 맡았다. 전력분석원에서 물러난 후, 2021년 11월부터 충주 국원초등학교의 코치를 맡고 있다. 여러 위치에서 제2의 인생을 이어갔고, 여러 위치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고려대 코치 시절은 어땠나요?
제가 학교 다닐 때의 분위기와 그때의 분위기는 너무 달랐습니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죠. 그렇지만 (전)현우(대구 한국가스공사)와 (박)준영이, (박)정현이(이상 국군체육부대) 등 고학년 선수들과 (하)윤기(수원 KT)-(이)우석이(울산 현대모비스)-(서)정현이(전주 KCC) 등 좋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그런 선수들과 오랜 시간 함께 하지 못한 게 아쉬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고려대 코치 생활은 길지 않았습니다. 부산 KT의 전력분석원을 맡으셨는데요.
선수일 때는 저만 챙기면 됐습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입장이었죠. 그렇지만 전력분석원은 스태프의 일원입니다. 선수들한테 많은 걸 제공해야 해요. 선수 시절과는 너무 다른 세계여서,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또, 전력분석원은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직업입니다. 하지만 저는 컴퓨터를 해본 적이 전혀 없어요. 다행히 사수였던 배길태 코치님(현 SPOTV 해설위원)께서 전력분석에 능통하신 분이라, 저를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덕분에, KT에 있는 동안, 컴퓨터가 많이 는 것 같아요. 지금도 컴퓨터를 하다 보면, 배길태 코치님 생각이 많이 나요.(웃음) 그 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저는 농구 인생을 이어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배길태 코치님에게 너무 감사해요.
2021년 11월부터 충주 국원초등학교의 코치를 맡았습니다.
KT 전력분석원에서 물러난 후, 두 달 정도 쉬었습니다. 그때 충주에 계신 지인께서 충주 국원초등학교 코치 자리를 추천해주셨어요. 그런 계기로, 충주를 가게 됐죠.
초등학생과 함께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프로 선수 혹은 대학 선수와의 차이가 클 것 같아요.
이전에는 어느 정도 완성된 선수들만 봤습니다. 그렇지만 초등학생 선수들은 백지장 같은 느낌이 있어요. 오히려 (프로 선수들보다) 더 나은 습득 능력을 갖고 있고, 습득 시간도 완성된 선수들보다 짧아요. 농구에 관한 데이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성취감이 더 크실 것 같아요.
작년에 그런 걸 많이 느꼈어요. 대회를 거치면서 발전하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성취감과 뿌듯함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여러 보직을 경험했습니다. 선수 시절에 경헜했던 농구와는 달랐을 것 같아요.
선수 때는 코칭스태프께서 만든 프로그램을 이행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제가 그런 계획을 다 수립해야 해요.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했죠.
특히, 초등학생한테 중요한 건 흥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농구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까?’를 연구합니다. 그런 쪽으로 지도 방향을 설정하고 있는 이유죠.
또, 초등학생은 포지션에 구애를 받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포지션의 기본기를 익혀야 합니다. 제가 가르치는 친구들이 당장의 조건 때문에 제한된 포지션을 이행한다면, 농구 선수로서 성장하는데 한계가 있거든요.

“농구요? 애증이죠(웃음)”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주태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자신의 농구 인생이 어땠냐?”고 말이다.
주태수는 ‘농구’를 ‘애증’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을 힘들게 만든 것도 농구지만, 자신을 지금의 위치로 만든 것도 농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다만, “다시 태어난다면, 농구가 아닌 다른 걸 해보고 싶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를 지금의 위치로 만든 것도 농구고, 저를 힘들게 만든 것도 농구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애증’이죠.(웃음) 하지만 지금의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만든 것도 농구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농구인들께서 비슷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주태수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제 능력에 비해 오랜 시간 농구를 했거든요.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아니요.(웃음)
어떤 걸 해보고 싶으세요?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면, 야구를 해보고 싶어요. 제 고향이 부산이고 제 동네가 야구를 많이 해서, 야구를 좋아했거든요. 또, 제 옆 학교에 추신수(SSG 랜더스)와 이대호, 정근우(이상 은퇴) 등 저랑 같은 나이대의 선수들이 야구를 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야구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친아버지께서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야구를 못하게 됐고, 전학을 갔어요. 전학 간 학교에서 농구 인생을 시작했고요.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사진 =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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