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도·열녀·소녀… 해묵은 시선에 갇힌 여인 풍속화[북리뷰]

박동미 기자 2023. 5. 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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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미술, 젠더로 읽다
고연희 등 11명 지음│혜화1117
윤덕희가 그린 ‘책 읽는 여인’
배경은 명나라 상류층 정원
“조선 남성 위계인식 드러내”
日그림엔 여성에 생산성 요구
中선 사망후 가택신으로 그려
亞미술 속 성차별 입체적 고발
‘젠더’라는 확장된 개념을 통해 예술을 읽으면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윤덕희의 ‘책 읽는 여인’(위 큰 그림) 속 여성은 명나라 정원에 앉아 있고, 청나라 초상화 속 여인(아래 왼쪽)은 남성 관료의 옷을 입고 있다. 일본에선 ‘여성의 생산성’을 강조한 그림이 많았는데, 오른쪽 그림은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우키요에 ‘여직잠수업초’ 열두 장면 중 하나다. 혜화1117 제공

조선 시대 여성이 책 읽는 풍경, 즉 ‘독서여인’을 주제로 한 그림은 단 한 점뿐이다. 남성 화가인 윤덕희(1685∼1766)가 그린 ‘책 읽는 여인’이 유일하게 전한다. 그림은 반듯하게 앉아 차분하게 책을 읽는 모습을 비단에 수묵담채로 표현했다. 제작 시기가 18세기 중반임을 고려하면, 조선 후기 상류층 여성을 재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제껏 당시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풍속화의 하나로 분류돼 왔다.

한·중·일 옛 그림 속 여성들의 모습을 오늘날 가장 화두인 ‘젠더’ 프리즘으로 분석하는 책 ‘동아시아 미술, 젠더로 읽다’에서 고연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 교수는 윤덕희의 ‘책 읽는 여인’이 “온전한 풍속화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책을 엮었으며 11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고 교수는 그 근거로 그림의 배경을 지적한다. 여인이 걸터앉은 목재 의자와 뒤에 세워진 거대한 삽병(揷屛) 등이 중국 명나라 상류층 정원을 그대로 옮겨온 모양새라는 것. 제목을 다시 짓는다면 ‘명나라 정원에서 책 읽는 조선의 여인’쯤 되겠다. 남성 화가가 그렸고, 향유한 이들도 남성. 고 교수는 이 그림에서 “여성의 독서와 남성의 독서를 차별화하고, 다시 중국 여성과 조선 여성을 다르게 보았던 조선 남성들의 사고방식이 드러난다”고 했다. 즉, 남녀 차별과 한·중 문화 위계 인식 속에서 생산된 비현실적 이미지인 셈이다.

‘젠더’는 ‘지금, 여기’의 키워드다. ‘오늘’의 시선으로 ‘옛날’을 돌아보는 시도가 굉장히 새로운 것도 아니며, 또한 그것은 시대의 맥락과 특성을 ‘한계’로만 몰아붙일 위험도 있다. 그러나 책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리고 더욱 자유롭게 이 ‘시도’들을 지속해야 한다는 걸 스스로 증명한다. ‘책 읽는 여인’에게 왜 ‘조선의 공간’은 허락될 수 없었나. 19세기까지 조선 여인의 독서상은 왜 온전한 회화 작품이 될 수 없었나. 지난 시대의 산물을 현재진행형 논의의 현장으로 소환하지 않고서는, 존재조차 할 수 없을 질문일지 모른다.

조선 시대 그림 한 장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명·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일본 에도 시대로 건너갔다가, 근대 한·일 양국을 넘나드는 등 책은 마치 ‘타임 슬립’과 같은 형태로 예술을 ‘읽는다’. 국내 미술계에서 중추 역할을 하는 연구자들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서 들고 온 주제들은 제목만 들어도 흥미롭다. ‘책 읽는 여성’을 논한 ‘그림 속 책 읽는 여인을 향한 두 개의 시선’을 비롯, ‘그림 속 박제된 여성들, 다시 보는 명·청대 여성 초상화’(지민경), ‘미인도 감상을 둘러싼 조선 문인들의 딜레마’(유미나), ‘조선의 열녀, 폭력과 관음의 이중굴레’(유재빈), ‘일본 경직도 속 여성의 노동, 드러나는 젠더’(이정은), ‘근대, 소녀의 탄생’(김지혜) 등이다. ‘미인도’ ‘열녀’ ‘소녀’ 등 익숙한 키워드들이 시대와 지역, 매체의 경계로부터 벗어나고, ‘11개의 시선’이 뭉쳤다 흩어지는 과정에서 독자들은 그동안 단순하게 그림을 ‘해석’하던 것을 넘어, 역동적으로 예술을 보고, 읽고, 느낀다는 것의 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지민경 홍익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명·청대에 서민에서부터 상류층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남성 관료의 복장을 한 여성 초상 제작 현상을 조사한다. 지 교수에 따르면, 당시 중국 초상화는 본질적으로 피사 인물을 통해 상징화된 특정 사회나 집단의 도덕적 가치를 영속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남성의 옷을 입은 여성들은 누구였나. 바로 고인이 된 어머니 혹은 할머니였다. 지 교수는 “‘여성 조상들’을 기억하는 방식에서 당시 ‘남성 후손들’의 이중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면서 ‘조작된 이미지’로 박제돼 자신들의 가문을 높이는 장치로 사용한 의도를 읽어냈다. 마치 ‘가택신’처럼 ‘조상신’이 되는 지위 상승을 (죽어서야) 누리지만, 정체성은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이다.

여성의 노동도 옛 그림 속에서 자주 미화되고 조작됐다. 책은 이를 일본의 우키요에를 통해 설명한다. 이정은 한국외대 미네르바 교양대학 교수는 농업이나 잠업과 관련된 일련의 작업, 기술, 풍속을 묘사한 ‘경직도’를 통해, 비단을 만들고 직물을 짜는 ‘미인’이 여성의 생산성을 요구한 강력한 ‘사회적 음모’였다고 지적한다. 젊고 수려한 여성들의 노동 장면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것의 이면을 알게 되면, 앞으로 우키요에는 물론, 여성들이 존재하는 그 어떤 그림이라도 보다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다분히 현대적이며, 태생적으로 ‘뾰족한’ ‘젠더’의 개념을 장착하고 11개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자꾸 ‘그때’의 남성들과, 그들의 인식을 야단치려 드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른다. 한 시대를 살며, 당대 요구된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그들에게 아주 조금 미안해지는데, 그들이 이 ‘사실’을 절대 알 길은 없으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한다. 여성주의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일은 자칫 일차원적 시도에 머무는 때가 많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의 연구자들은 각자의 언어로 하나의 방향을 설명하는 새로운 길을 닦아냈으니, ‘젠더’와 ‘예술’의 매칭으로서 당분간 더 큰 성취는 없을 것 같다. 456쪽, 3만6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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