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대한 ‘성폭력의 세계사’ [새로 나온 책]

시사IN 편집국 2023. 5. 1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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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기자들이 직접 선정한 이 주의 신간. 출판사 보도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기자들이 꽂힌 한 문장.

 

수치

조애나 버크 지음, 송은주 옮김, 디플롯 펴냄

“우리가 여전히 성폭력범을 교도소에 수감하는 것 외에 효과적으로 다룰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다.”

이 방대한 ‘성폭력의 세계사’를 읽다 보면 ‘여성에게는 국가가 없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된다. 책은 성폭력의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특히 중산층, 이성애자, 젊은 여성 바깥의 성폭력 피해 역시 촘촘히 살핀다. 성폭력 생존자에게 전가됐던 ‘수치’라는 감정을 전복시키는 일은 이 책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다. 성폭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념과 제도, 법과 권력이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이야말로 수치이기 때문이다. 때로 아득해지는 피해 사례들 사이에서도 비관과 좌절 대신 협력과 우정의 가능성을 탐험해보게 된다.

 

 

 

 

 

 

 

 

 

 

북한 이주민과 함께 삽니다

김이삭 지음, 나무발전소 펴냄

“우리는 그저 연애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저자는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어났다가 탈북한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북한 남성을 어떻게 알게 됐느냐는 질문부터 “남한 남성과 좀 다르지 않아?” “결혼할 때 너희 집에서 반대 안 했어?” “시댁은 어때?”까지 수많은 질문을 뚫고서.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른 명절 풍경과 음식 문화를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우리 사회의 경계심과 편견을 녹여낸다. “함께 북한을 거닐면서 산책하는 날이 오기를, 배가 고프면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장마당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적은 글을 읽다 보면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걸 깨닫게 된다.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헬레나 로젠블랫 지음, 김승진 옮김, 니케북스 펴냄

“자유주의자들은 이기주의의 위험에 대해 끝없이 경고했다.”

스웨덴 출신의 지성사 연구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고대 로마로부터 21세기까지 자유주의의 역사를 낱낱이 추적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는 파란만장한 역사적, 지적 파고를 겪다가 20세기 중반의 미국이란 시공간에서 형성된 비교적 최근의 개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공식 연설 때마다, 많게는 수십 번에 걸쳐 ‘자유’를 언급한다. 다른 정당을 ‘자유를 농락하는 사기꾼’으로 몰아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윤 대통령과 측근들이야말로 ‘공적 권력을 사적 이익과 취향에 남용하는 자유의 적’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차원의 혼란은 ‘자유주의’란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정치 언어란 점과 무관치 않다. ‘자유’ 개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진행 중인 한국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샅샅이 읽을 가치가 있다.

 

 

 

 

 

 

 

 

 

 

 

일할 자격

희정 지음, 갈라파고스 펴냄

“신인류를 디자인한 사회는 ‘정상인 되기’를 강제하는 수많은 장치를 가졌다.”

학교도 직장도 다니지 않는 ‘니트족’이 증가했다는 기사에 동정과 지탄이 뒤따른다. ‘그냥 쉬었다’는 청년들은 근성 없는 존재로 평가당하기 일쑤다. 회사원들의 첫 직장 근속 평균이 1년2개월이라는데, 직장보다는 개인을 탓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다. 노동에 대해 고민하는 기록활동가는 성실하지 않은 청년들을 찾아 나섰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노동자성’에서 미끄러졌거나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통해 노동의 자격을 묻는다. 건강한 정신을 갖출 수 없는 사람들, 게으름뱅이, 낙오자 등 “노동자이지만 좋은 노동자는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다. 섣부른 동정도 지탄도 필요치 않다. 모두가 일해야 한다지만 아무도 일할 수 없는 사회를 밀도 있게 드러낸다.

 

 

 

 

 

 

 

 

 

 

 

피아노 시작하는 법

임정연 지음, 유유 펴냄

“다른 악기에 비해 시작이 쉽다.”

영화 〈라라랜드〉를 보고 난생처음 피아노를 배웠다. 〈바이엘〉을 떼고 〈체르니 100〉에서 멈췄다. 피아노를 가구로 방치하다,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의 임승수처럼 고독한 방구석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다시 피아노〉의 앨런 러스브리저처럼 피아노 전용 원두막을 지을 수 없어도, 은퇴 뒤 피아노를 치는 삶이란···. 피아노 위 물건을 치웠다. 피아니스트이면서, 취미생을 10년 넘게 가르친 저자가 오랜 교육활동의 핵심을 담았다. 중간중간 포함된 QR코드를 찍으면, 저자의 유튜브 ‘연피아노 yeonpiano’로 연결된다. 〈바이엘〉 〈체르니〉 〈하농〉 등 200년 전 교재가 따분한 늦깎이들에게 저자는 1순위 입문서를 추천한다. 당장 주문했다.

 

 

 

 

 

 

 

 

 

 

 

캘빈과 홉스

빌 워터슨 지음, 신소희 옮김, 북스토리 펴냄

“나를 지켜준 소중한 친구 덕분이라네.”

소박하고 성실한 만화가 빌 워터슨이 1985년 11월18일부터 1995년 12월31일까지 꼬박 10년 동안 연재했던 만화 ‘캘빈과 홉스’ 전편이 수록된 전집이 나왔다. 비싸고(10만2600원) 무겁지만(6.3㎏), 팬이라면 그저 반가운 소식이다. “〈캘빈과 홉스〉가 내 수명을 깎아먹는 것만 같았다. 그 무렵 나는 균형 잡힌 삶을 포기했고 당연하게도 지극히 불규칙하게 생활했다. (중략) 물론 이 작품을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만 말이다”라는 작가의 머리말로 시작하는, 1000쪽에 달하는 만화책을 넘기다 보면 독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를 누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시사IN 편집국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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