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사람들 거대 사진 콜라주로 드러낸 인류세의 현실
‘짜깁기’의 상상력과 기술로 그는 세상을 바꿨다. 수많은 지구촌 사람에게 인류세가 직면한 현실을 일러줬고, 공공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냈다.
프랑스 출신의 40살 사진가 제이알(JR). 그는 지금 세계 미술계와 사진계의 젊은 거인이다. 불과 20여년만에 이런 파천황의 능력을 발휘하며 세계 현대미술사에 우뚝한 대가로 섰다. 그만큼 지구촌 규모로 거대한 공공미술작업을 벌인 대가는 여태까지 없었다. 세계 각지 사람들의 수많은 얼굴 사진들을 짜깁기하고 거대한 인물초상을 건축물 표면이나 거리의 바닥에 내리꽂거나 내붙이는 포토콜라주 기법은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이런 독특한 설치적 사진들을 벽화, 동영상, 그래픽 등의 장르와 도시, 농촌 등의 공간, 디지털 테크놀로지 등을 통해 절묘하게 구사하면서 양극화와 생태위기, 여성인권, 세대갈등 등의 인류세의 현실적 화두를 세계 각지의 대중에게 강력한 이미지로 설득력 있게 전파했다.
지난 3일부터 서울 잠실 롯데 월드타워 7층 롯데 뮤지엄에 차려진 제이알의 첫 한국 회고전 ‘제이알:크로니클스(연대기)’에서 예술가의 감성과 냉정한 현실인식을 함께 품은 이 천재 작가가 20년 동안 인류와 함께 펼쳐온 작업 여정을 파노라마처럼 돌아볼 수 있다. 2019년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독일 뮌헨 쿤스트할레에 이어 롯데 뮤지엄에서 아시아 최초로 차려진 이 전시는 도시 건축물과 거리, 철거촌의 폐허, 농촌과 서민촌의 집 따위를 화폭과 전시장으로 삼아 작업해온 작가의 그간 행보들을 여러 섹션들을 통해 펼쳐 보인다. 실제로 작가는 이번 전시의 들머리와 마지막을 이른바 ‘연대기’로 이름 붙인 세계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수많은 인물군상들을 빽빽이 이어붙인 콜라주 패널들을 통로 양옆에 설치한 얼개로 정리해놓았다.
동유럽과 튀니지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난 작가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소년 시절 또래들과 어울려 낙서 작업을 하다가 2001년 파리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삼성 카메라를 주우면서 사진가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동료들의 낙서 예술 퍼포먼스 등을 담으며 거리예술에 관심을 키운 그는 2005년 10월 파리 변두리에서 발생한 이민자들의 소요 사태를 카메라에 기록하고, 도심 곳곳 건물에 인물군상의 사진 초상을 붙인 작업들을 벌이면서 그를 세상에 알린 ‘세대의 초상’ 연작을 만들게 된다.
전시장은 그의 작업경력에서 중요한 초창기 낙서화 기록작업과 <세대의 초상> 연작의 형성과정을 상당한 비중으로 할애한다. 우선 2000년 제이알이 사진작업을 하는 시발점이 된 삼성 카메라를 전시장 들머리 진열장에서 만날 수 있고, 2004년부터 파리 근교 변두리의 소외된 아프리카 이민자 동네의 청년과 청소년들을 포착하면서 시작된 <브라카쥐, 래드 리> 등으로 시작한 <세대의 초상> 연작들을 2010년 이후의 작업들까지 볼 수 있다. 특히 2013년 작업한 <세대의 초상>연작은 철거작업으로 폐허가 된 프랑스 지방의 아파트 옆면에 흑인 젊은이들의 군상을 확대한 대형 사진들을 붙여 놓았다. 흑인 청년들의 공허한 현실을 일깨우는 호소력이 남다른 장소 특정적 작품이다.
2006~2007년 작업한 <페이스 투 페이스>연작이 내걸린 4섹션 전시장 얼개에도 시선이 쏠린다. 작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로지르는 국경 벽 양쪽에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 두 나라 사람들의 유머러스한 대형 초상사진을 나란히 전시하면서 한 인간으로서 서로 닮았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그 뒤 2008~2015년 작업한 ‘도시의 주름’ 연작은 도시 공간의 한 구석을 점유한 노인들의 주름진 얼굴들이 인상적이다. 파리, 이스탄불 등 오랜 역사 도시의 낡은 건물들 외벽에 도시와 함께 세월을 겪어온 노인들의 거대 사진들을 붙이며 도시의 역사성을 생생한 이미지로 추체험하게 하는 이 연작들은 그의 또 다른 수작들로 꼽힌다.
후반부 작업에서 주목되는 것은 2017년 작업한 인물군상 콜라주 대형 작업인 <클리시-몽페르메유 연대기>다.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동자계급 이민자들이 많은 프랑스 파리 근교의 클리시 몽페르메유 지역의 주민 750여명을 카메라에 콜라주해 담은 이 작업연작들은 희망이 사그라진 가난한 도시 변두리 지역 사람들의 빈곤, 불안과 불만, 울분 등을 역동적인 몸짓들로 표출해낸 것이 특징적이다. 이런 맥락의 연작은 201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의 시민들의 군상들을 짜깁기해 보여주는 또 다른 도시 연대기로 이어진다.
전시 말미에서 가장 돋보이는 수작은 2017년 제이알의 작업한 멕시코 국경의 피크닉 사진이다. 그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 장벽을 가로질러 자리를 펼쳐놓고 수백명의 두 나라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하는 대규모 피크닉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이를 내려다본 사진을 찍었다. 불법 이민자 출신 젊은이 마이라의 두 눈을 찍은 사진 작품이 피크닉의 배경으로 펼쳐졌다. 멕시코 쪽은 거대한 식탁이 차려졌지만, 미국 쪽은 당국이 식탁 설치를 불허해 천으로 된 자리만을 펼치는 것으로 진행된 이 사진작업들은 진행과정을 담은 영상과 함께 큰 울림을 남긴다.
히틀러 정권의 파시즘을 풍자한 독일 좌파 작가 존 하트필드의 20세기 초 콜라주아트나 신학철, 박불똥 같은 한국민중미술가들이 80년대 벌인 콜라주 아트의 21세기판 진수를 보여주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8월6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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