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한반도 동쪽 끝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
(포항=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한반도 지형을 호랑이 형상이라고 할 때, 포항 동쪽 끝 해안은 그 꼬리에 해당한다고 해서 호미곶(虎尾串)이라 명명됐다. 행정지명으로 공식화된 시기는 2001년이다. 그러나 한반도 땅을 호랑이 모양으로 본 것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랑이 꼬리' 호미곶
조선 중기 학자이자 풍수지리 대가인 남사고(1509∼1571)는 '산수비경'에서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이라고 한반도 지세를 기술했다. 백두산은 호랑이 코, 포항 동단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국토 동쪽 끝을 측량하기 위해 현재의 호미곶에 해당하는 지역을 일곱 번 답사했다고 한다. 그는 이곳이 한반도의 최동단임을 확인한 뒤 호랑이로 치면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고 기록했다.
육당 최남선은 1908년 간행된 한국 최초의 잡지 '소년'에서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묘사하면서 동단(현재의 호미곶)의 일출을 조선 10경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일제가 한반도 지형에 나약한 토끼 이미지를 부여하고, 그 동단을 토끼 꼬리라고 했던 것은 오래 가지 못할 억지였다.
빛의 바다, 해맞이 땅
한반도 동쪽 해안선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리다가 포항에서 휘돌아 영일만을 만들어낸 뒤 바다를 향해 동북쪽으로 다시 돌출한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육지가 호미 반도이다. '영일'(迎日)은 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 명칭은 서기 157년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고려 초부터는 공식 지명으로 사용됐다. 요즘 전국 최고의 일출 명소로 자리 잡은 호미곶이 고대에도 해맞이 지점으로 특정된 것은 이곳이 한반도의 가장 동쪽이라는 데서 연유할 것이다.
연오랑세오녀 전설은 호미 반도가 해돋이 땅임을 거듭 확인한다. '삼국유사'에는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동해 해변에 살다가 신라 8대 아달라왕 4년(157년)에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기록돼 있다. 이들이 떠나자 신라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신라 왕이 사신을 보내 이들을 다시 데리고 오려고 했으나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세오녀가 짠 비단을 주며, 그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해와 달이 다시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대로 행한 결과 신라의 해와 달은 빛을 되찾았다.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살았다고 전해진 곳에 지금은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이 조성돼 있다. 지금도 이 공원 앞 바다에 무동력선을 띄우면 일본 혼슈(本州)섬의 남서부 해안인 시마네(島根)현에 닿는다고 한다. 연오랑세오녀는 어로 작업 중 조난됐다가 해류를 타고 일본에 닿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테마공원에 서면 영일만 건너편에 자리 잡은 세계적 철강회사 포스코의 공장들이 연출하는 장대한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24시간 가동되는 쇳물 공장의 불빛은 영일만 검푸른 바다를 비추는 새로운 빛이다.
파도 소리 들으며 걷는 힐링 로드…호미 반도 해안 둘레길
호미곶에는 총 24.7㎞에 달하는 둘레길이 있다. 영일만을 끼고 동쪽으로 쭉 뻗은 도보 여행 길이다. 냉천을 사이에 두고 포스코와 마주 보고 있는 청림에서 시작해 호미 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도구 해변, 선바우길을 지나 구룡소를 거쳐 호미곶 광장까지 이어진다.
1코스 연오랑세오녀 길, 2코스 선바우 길, 3코스 구룡소 길, 4코스 호미 길로 이루어져 있다. 4개 코스 모두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해안 길이며, 각 코스는 5∼6㎞이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은 1코스 끝이자 2코스 시작점이다. 전 코스를 걷는다면 6시간 이상 걸리는 게 보통이다.
일부 구간만 탐방해도 동해의 시원스러운 풍광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2, 3코스에는 힌디기, 하선대, 장군바위, 구룡소, 악어바위, 독수리바위 등 특이한 해안 지형이 모여 있다. 해맞이 광장이 있는 호미곶 관광지는 새해 1월 1일뿐 아니라 연중 내내 관광객이 붐비는 명소인 만큼 빼놓을 수 없는 탐방지이다.
호미 반도는 화산 활동의 결과로 생긴 지형이다. 화산 성분의 백토로 형성된 힌디기는 하얀 언덕이란 의미의 '흰덕'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검은빛의 현무암질 집괴암이 분포하는 구룡소에는 움푹 파인 돌개구멍이 많다. 돌개구멍에서 힘차게 솟구치는 흰 파도는 승천하는 용이 몸을 비트는 용트림을 연상시킨다. 꼬불꼬불한 해안가에 있는 장군바위는 장군이 아이를 업고 영일만으로 걸어가는 형세이다.
독수리바위 일대는 풍파가 심할 때 청어가 밀려오는 지점이다. 까꾸리(갈고리의 방언)로 청어를 끌어 담았다는 뜻에서 '까꾸리개'라고 부른다. 현무암 자갈, 황회색의 모래, 진흙으로 이루어진 악어 바위는 바다에서 기어 나온 악어를 떠올린다. 해안단구 앞에 형성된 악어 바위는 바다 계단을 지키는 소맷돌 같다.
세계 등대 유산과 상생의 손
2000년 1월1일 새천년 한민족해맞이 축전 개최 장소였던 호미곶 광장에는 볼거리가 적지 않다. 1908년 서구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호미곶 등대는 지난해 국제항로표지협회(IALA)가 세계등대유산으로 지정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높이 26.4m의 하얀 등대는 기초부터 등탑 중간까지 외곽선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다 건물 폭이 점차 좁아지는 모양이다.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았으나 암반 위에 세워져 100년 이상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굳건하게 서 있다. 6층으로 된 등대 내부의 각 층 천장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조각돼 있다.
등대 앞은 결혼 기념사진 촬영 장소로 사랑받는다. 등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국내에서 유일한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상생의 손' 조형물은 서로 돕는 국민을 상징한다. 오른손 조형물은 바다에, 왼손은 육지에 우뚝 서 있으며,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바다에서 솟아오른 듯한 오른손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태양과 다섯 손가락 끝에 앉은 갈매기들의 평화로운 모습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왼손 조형물 앞에는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씨 함이 방문객을 매혹한다. 이 불씨는 1999년 12월31일 변산반도의 해넘이, 2000년 1월1일 날짜 변경선에 위치한 피지섬과 호미곶의 해맞이 때 채화했다.
영원히 타오를 불꽃 앞에 서면 태고부터 변함없이 푸른 동해 수평선 위로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염원을 자신도 모르게 되뇌게 된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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