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아빠가 떠난 맛”을 알게 된 ‘아이’의 고요한 반전
24년간 펴낸 4권 중 첫 국내 번역
먼 친척에 보내진 여자아이의 한철
암시와 절제의 감동…이달 영화로도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l 다산책방 l 1만3000원
아일랜드 여성작가 클레어 키건(55)의 작품이 국내 처음 번역됐다. 2009년 중편 <맡겨진 소녀>. 이달 31일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도 개봉된다.
원작과 영화가 같을 수도 없지만 특히나 두 작품의 다른 결은 키건의 기법으로 먼저 설명되어야겠다.
<맡겨진 소녀>는 암시로 이야기를 직조해 암시로 마감한다. 간결하다. 하지만 읽는 자들은 결국 다 보게 되리라.
이런 느낌으로 우리가 만나는 한 여자아이(‘나’)는 말이 많지 않다. 작품 전체에서 아이가 누구에게든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맡겨진 소녀’의 정체성을 더덜없이 암시한다. 강요된 정체성이자 길들여진 침묵이라는 사실, 말하자면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세계의 여자아이.
이러한 사실이 은밀하고 느리고 정교하게 드러나는 터라, 이야기 끄트머리 소녀의 ‘말걸기’는 실로 극적이다. 한없이 고요하게 한없이 충격적인 반전이라 해도 억지스럽지 않겠다. 다 읽고서야 누군가는 돌연 울지 모르겠고, 다 읽고서야 누군가는 애틋해진 마음을 뒤적이느라 처음부터 재독해갈지도 모르겠다.
(해서 마지막 대목은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 영화로나 그 장면을 ‘보겠다’ 하면 그저 그러시라 하겠다.)
소설의 원제 ‘Foster’(포스터)는 위탁 양육을 뜻한다. ‘먹인다’ 뜻의 말밑에서 파생했다. 1980년대 초 아일랜드. 존과 메리는 가난한 데다 또 아이를 갖게 되면서 여름 한철 딸(‘나’)을 먼 친척집에 보내기로 한다.
아이의 시선은 넓고도 섬세하며 발화만 되지 않을 뿐 언어는 예리하다. 그가 알 수 없는 사실조차도 시선에 포착되는 한 이미 아는 것이 되는 양. 하지만 지난 불행이 뻔했으므로 차라리 먼저 비관하고 각오하면 덜 다치는 생존법에 가깝다.
그러니 비극이 비극으로 과장될 여지가 없다. 이런 상황조차.
엄마가 전한 말을 묻는 친척 아주머니에게 ‘나’는 말한다. “두 분이 원하시는 만큼 저를 데리고 있어도 된다고요.”
길들여진 세계를 낯선 세계로 내몰아주는 이들이 바로 “맡겨진” 곳의 먼 친척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다.
무릎을 꿇릴 것 같았지만 이불을 덮어주고, 헛간 청소를 시킬 줄 알았는데 토스트 굽는 법을 알려주고, 일도 하지 않은 아이에게 초코아이스를 사 먹자고 1파운드 지폐를 주는 어른들.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난생처음 경험하는 것들은 여자아이에게 그간의 세계가 온당하지 않았음을 속삭여준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아주머니 따라 우물가에서 마신 물맛조차 그랬다.
첫 번째 반전은 이웃의 장례식장에서 킨셀라 부부가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였다. 친절하게도 아이를 잠시 봐주겠다던 이웃 아주머니 밀드러드가 그러고선 아이에게 떠벌린 비밀 아닌 비밀에서 비롯된다.
이 대목에 오기까지도 작가는 이 대목으로만 닿는 여러 암시와 복선을 깔아뒀다. 아이는 머물던 방 벽지에 그려진 남자애 모습에서 연민을 느낀다. 어떤 일로 아이를 타이르며 킨셀라 아주머니가 한 말은 “이 집에 비밀은 없어, 알겠니?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였다.
킨셀라 부부가 아이를 데려오며 밀드러드와 괜찮았냐고 물었을 때 ‘비밀’ 없이 아이는 말한다. 아마 여자아이의 가장 긴 대사이지 않을까.
“아주머니랑 아저씨한테 아들이 있었는데 개를 따라 거름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죽었다고, 제가 지난주 일요일 미사에 입고 간 옷이 그 애의 옷이라고 했어요.”
두 번째 반전은 아이의 더 단단해진 마음이다. ‘비밀이 없는 집’에서 이미 처음 경험해보거나 처음 들어본 말들 때문이고, 그 말과 행위로 확신하게 되는 부끄러움 없는 세계의 견고함 때문이리라.
밀드러드 일로, 킨셀라 아저씨는 아이를 바닷가로 데려가 산책한다. 농담도 잘하는 킨셀라씨-그건 죄다 여자아이를 위한 농담이었다-가 새겨준 어른의 말은 이렇다.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친척집에 맡겨진 초기 여자아이가 두려운 행복감으로 독백한 대목과 호응한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나는) 깨닫는다.”
불행한 침묵은 몸이 길들여진 결과이고, 행복한 침묵은 마음이 서로를 길들인 덕분인 것이다.
이 고요한 사랑과 우정이 마침내 말미 침묵이 아닌 방식으로 폭발한다고 앞서 서술했다. 아이와 킨셀라 부부가 작별하는 때였다. 작별의 심리는 어떻게 행동으로 드러나는지 키건이 다 담았다.
영화에서도 마지막이 하이라이트일 것이다. 제목 <말없는 소녀>(아일랜드어)의 감독 콤 바이레드는 ‘2022 부산국제영화제’ 인터뷰 영상에서 “2018년 작품을 처음 읽고 너무 좋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거부할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연기 경력이 전무했던 캐서린 클린치 주연(카이트 역)으로 영화는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크게 흥행했고 런던비평가협회상(외국어상)을 받고 미국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소설은 2009년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받았고, 영국 매체 <타임스> 주관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에 선정됐다고 한다. 키건은 최근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영화에선 극적 긴장을 높이려고 킨셀라 아저씨와 아이의 초반 마찰도 가미되는 듯하다. 소설에서 킨셀라 부부는 아이를 단 한번 배반하지 않는다, 단 한번도 애태우지 않는다.
메시지를 담은 신들로 엮어 그 신들의 합 이상을 드러내려는 영화와 드러내기 위해 감추는 키건의 이 소설이야말로 차이는 선명하다. 키건이 구축한 암시와 절제의 문법은 그가 1999년 첫 단편집 <남극> 이후 이제껏 4권의 책만 출간했다는 사실조차 하나의 암시처럼 호기심을 일으킨다.
“이번 여름이 끝날 때쯤이면 넌 순록처럼 달리게 될 거”라고, “널 잡을 수 있는 남자는 우리 교구에서 한 명도 없을 거”라고, “꼭 바람 같”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달리기를 가르친 킨셀라 아저씨에게 결국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침묵이 그리 길었나 싶은, 반전의 아이를 만났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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