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구식’ 부인은 왜 껍데기뿐인 결혼생활을 견뎠나 [책&생각]
루쉰의 첫 부인 주안의 쓸쓸했던 한평생
루쉰의 삶과 작품에도 큰 영향 미쳐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
주안전
차오리화 지음, 김민정 옮김 | 파람북 | 1만9500원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루쉰(1881~1936, 본명 저우수런)은 ‘5·4 신문화운동’의 주역으로서 모든 봉건적인 사상과 제도를 거부하며 격렬했던 대전환의 시대에 새길을 낸 인물이다. 신교육을 받은 루쉰은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그는 정작 자신이 고쳐야 할 것은 ‘몸’이 아니라 봉건적인 사상과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국인의 ‘정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의학을 버리고 “국민의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 문학으로 전향한다. 봉건 잔재를 거부하고 깨뜨리는 것은 한평생 안주하지 않았던 혁명적 지식인의 출발점이었다.
이런 루쉰에게 죽을 때까지 ‘전족’(천 등으로 발을 묶어 작게 만드는 중국 봉건 시대의 풍습)을 풀지 않았던 ‘구식’ 부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루쉰이 베이징에서 교편을 잡던 40대 때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가 나중에 부부가 된 ‘신식’ 여성 쉬광핑(1898~1968)이 루쉰의 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앞서 루쉰은 20대 중반에 사오싱에서 주안(1878~1947)과 혼례를 올린 바 있다. 어머니의 일방적인 일 처리에 따라 주안과 결혼했지만, 루쉰은 끝까지 주안을 ‘부양’ 대상으로 책임졌을 뿐 사랑의 상대로는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대편에 있던 주안의 입장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는 차오리화 상하이 루쉰기념관 연구원이 주안의 일생을 추적하고 기록한 책이다. 그동안 루쉰 연구는 여러 면에서 샅샅이 진행됐지만, “유독 주안만큼은 배제되어 관심을 끌지 못했”다. 특히 루쉰을 우상화했던 시대에 주안은 금기 대상이었으며, 문화대혁명 이후에야 주안이 “루쉰의 감정과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임을 인정하는 연구가 늘고 있는 추세다. 다만 봉건 타파를 주창한 혁명가가 ‘중혼’을 했다는 사실에는 그 자체로 곤혹스러운 대목이 있어, 여태껏 주안을 다룬 제대로 된 전기 한 편이 나오지 못했던 실정이다. 책은 남겨진 기록과 증언들을 총동원해 두 사람 관계의 전모를 드러내는 한편, “낙오자의 대명사가 되어 말을 잃고 어정쩡한 신세”에 처했던 구식 여성들의 목소리에 최대한 귀를 기울인다.
당시 보통의 사오싱 여자들은 모두 전족을 했고 그렇지 않으면 시집을 가지 못했으며, 주안 역시 전족을 했고 글을 배우지 못하는 등 봉건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저우씨와 주씨 양가는 루쉰이 공부하러 난징에 간 틈에 혼약을 맺었는데, 여기에는 루쉰 어머니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됐다. 이미 신식 교육을 받고 변발을 잘라버렸던 루쉰은 주안이 전족을 풀고 글을 배우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주안으로서는 이에 따를 수 없던 터라 둘 사이의 거리는 도저히 좁혀지기 어려웠다. 1906년 혼례를 치른 다음날부터 루쉰은 거처를 신방에서 어머니 방으로 옮겼고, 그 뒤로 두 사람은 최대한 서로 말도 섞지 않는 형식적인 부부로만 살았다. 루쉰은 외부인에게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좀처럼 털어놓지 않았는데, 오랜 친구에게 주안은 “어머니가 주신 선물”로 자신은 그저 “부양의 책임을 다할 뿐”이라고 했을 따름이다.
나중에 스스로 비유했듯, 주안은 자신이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나아가며 천천히 참고 견디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저우씨 도련님이 마음을 돌리는 날이 올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당시 결혼한 여자가 시댁을 떠나거나 남편이 죽었더라도 개가하면, 아들이 있어도 부양을 받을 수 없고 족보에도 들어갈 수 없어 죽어서도 안식처를 얻지 못했다. 특히 사오싱은 청말에도 절부, 열녀를 기리는 문화가 강한, 특히나 보수적인 지역이었다. 그러니 구식 여성이었던 주안에게 “죽어서도 저우씨 집안 귀신”이 되는 것 이외의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루쉰이 사오싱 옛집을 정리하고 베이징으로 옮길 때에도, 베이징에서 교편을 잡으며 ‘신여성’ 제자들과 교류할 때에도, 주안은 시어머니를 모시며 루쉰 곁에 남았다.
지은이는 루쉰의 작품들, 이를테면 봉건사상에 속박되어 비참한 끝을 맞이하는 ‘샹린댁’이 나오는 <축복> 같은 작품들 속에 자신의 어머니나 주안과 같은 구식 여성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음을 지적한다. “지식수준이 높지 않고, 얼굴빛은 검누렇게 떴으며 관심 있는 것이라곤 생활비와 남편의 월급뿐으로, 가끔 포악을 떨기도” 하는 이 여성들에게 루쉰은 깊은 연민을 가졌다. “그녀들은 절절하게 그의 눈앞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시시각각 ‘새카만 슬픔’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주안에게 사랑 또는 ‘거짓된 자상함’을 억지로 연기하는 것 또한 루쉰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주안이 머무는 베이징을 뒤로하고 쉬광핑과 함께 상하이에 정착한 뒤에야 루쉰은 비로소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는 평범하고 따스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다만 꼬박꼬박 생활비를 부치는 등 루쉰은 주안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고, 더 이상 ‘달팽이’로서의 희망도 갖지 않게 된 주안은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을 후반생의 업으로 삼았다.
루쉰(1936년)과 시어머니(1943년)가 세상을 떠난 뒤, 베이징에 홀로 남은 주안은 상하이에 있는 쉬광핑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루쉰을 기념하는 그의 사업을 지지했다. 일본군 점령 치하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때에는 루쉰의 장서를 팔려고 했으나, 쉬광핑을 비롯해 문화계 인사들이 이를 만류하기도 했다. 이때 주안이 격한 감정으로 했다는 말이 이 책의 제목이 됐다. “자네들은 루쉰의 유물을 보존해야 한다 하는데, 나도 루쉰의 유물이라네! 나도 좀 보존해주게나.”
주안은 1947년 6월2일에 69살의 나이로 쓸쓸했던 한평생을 쓸쓸하게 마쳤다. 루쉰이 “신사상을 받아들였지만 구식 공기 속에서 살아가는” 괴로움을 견뎌야 했다면, 그 반대편에는 모든 것이 바뀌던 시기에 무대 위의 신여성이 아닌 무대 뒤의 구식 여성으로 살아야 했던 주안이 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 여성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게 흩어져 버릴지 모른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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