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작가는 몸으로 일한다

한겨레 2023. 5. 1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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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케이(K). 르 귄은 무신론자였고, 톨스토이보다 찰스 다윈을 존경하였다.

그의 작품은 과학적 현실과 상상의 세계 사이를 넘나들며 인문학과 과학, 픽션과 논픽션,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예술과 기술의 경계를 확장하였다.

르 귄이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가는 몸으로 일한다"는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말이다.

르 귄은 노벨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에서 여성작가가 홀대받는 현실을 만천하에 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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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경의 과학 읽기]정인경의 과학 읽기

마음에 이는 물결
작가, 독자, 상상력에 대하여
어슐러 케이(K). 르 귄 지음, 김승욱 옮김 l 현대문학(2023)

어슐러 케이(K). 르 귄은 무신론자였고, 톨스토이보다 찰스 다윈을 존경하였다. 그의 작품은 과학적 현실과 상상의 세계 사이를 넘나들며 인문학과 과학, 픽션과 논픽션,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예술과 기술의 경계를 확장하였다. 나는 <어둠의 왼손>이 준 지적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물리학자들이 사고 실험을 하는 것처럼 르 귄은 전쟁이 없고, 착취가 없고, 젠더가 없는 세상을 상상으로 실험하였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해 직접 자신의 손으로 원하는 세상을 그려냈다. “판타지와 사이언스픽션은 애당초 독자가 살고 있는 실제 세상의 대안을 제시하는 장르”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마음에 이는 물결>은 르 귄이 생전에 쓴 산문집이다. 이 책을 비롯해 <세상 끝에서 춤추다>에는 어린 시절과 가정환경, 강연 원고, 독서 활동 등 작가의 소소한 일상과 세계관이 망라되어 있다. 거창한 작가론을 언급하지 않지만 재치있는 글 속에 진지한 주제의식이 가득하다. 르 귄이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가는 몸으로 일한다”는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말이다. 인간은 말하는 생물이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는 몸으로 하는 행동이다. 걷기와 숨쉬기에 생체 리듬이 있듯이 쓰기와 읽기에도 리듬이 있다. 작가는 글쓰기에 자기만의 리듬을 부여한다. 작가의 몸을 통과한 리듬은 생명력 넘치는 언어가 되어 독자의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다.

말하고 글 쓰는 우리는 언어의 소리와 리듬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책읽기 또한 역동적이고 창조적 행위다. 독자는 자기만의 속도와 박자로 책을 읽고, 작가와 독자는 서로 감정과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상상력을 활성화시킨다. 르 귄이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영향이 컸다. 책 제목 <마음에 이는 물결>은 울프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여성의 관계지향적 언어, 선주민의 토박이말, 구전문학에는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어머니말’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를 돌보는 ‘어머니말’보다 권위적인 문자언어인 ‘아버지말’을 배우며 살아왔다. 르 귄은 <세상 끝에서 춤추다>에서 “전 여자들에 대해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고 고백한다. 그의 어머니가 “왜 여자들에 대해 쓰지 않니?”라고 물었을 때 그리 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부끄러워한다. 이제는 여성의 몸과 마음, 상상력으로 세상을 다시 써야 한다. “여자가 살아온 경험을, 여자의 판단으로 쓰는 것보다 더 전복적인 행동은 없다.”

<마음에 이는 물결>에서 시도된 ‘다시 쓰기’는 실로 전복적이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나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을 비판하는 대목은 통렬하기 그지없다. 르 귄은 노벨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에서 여성작가가 홀대받는 현실을 만천하에 고발하였다. 인간 진화의 ‘장바구니론’과 같은 독창적인 가설을 주장하고, 울프의 말을 복원해서 “몸이 바로 이야기다”는 작가론을 펼쳤다. 책 맨 뒤에 실린 시, ‘일 위에 누운 작가, 일하는 작가’는 몇 번을 읽어도 감동적이다. 마지막 구절 “그녀는 일어나/ 그것을 글로 쓴다./ 그녀의 일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말, 여자들의 작품이 잊히지 않도록 지키는 것은 작가이자 독자로서 우리의 할 일이다. 내 인생에서 르 귄과 같은 존재를 만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끝>

정인경/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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