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1. 엄마, 엄마, 꿈에서도 엄마가 그려져요 -길종갑 화가

김진형 2023. 5. 1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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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듬뿍 찍어 완성한 심장같은 기억 그림
화천 사내면 토마토 기르는 농부 화가
과거·현재 내면의 삶 투영된 작품 활동
길종갑의 색채 오방색 강한 호소력 발산
어머니·마을 지인·자연 통해 영감 얻어
내달까지 고성서 ‘엄마의 정원’ 기획전
▲ 길종갑 화가

■ 사창리의 농부 화가

사내면에 웃는 화가가 있다. 그는 토마토를 기르며 그림을 그린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여 함께 어울리길 즐겨한다. 그러니 술이 빠질 리 없다. 그의 웃음은 저절로 미소 짓는 나한상 바로 그 모습이다. 빈틈이 많은 듯 보여도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꼼꼼한 면을 보인다. 정이 많아 친구들이 구름처럼 모인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일을 한다. 예전엔 아버지와 함께 백합과 국화를 길렀다. 품질이 좋아 높은 가격을 받았다. 주로 일본에 수출했으나 아버지가 작고한 뒤 토마토 농사로 바꿨다.

▲ 토마토가게

사내면에서 생산되는 토마토 또한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품이다. 나는 몇 년 전 이른 가을날 이 사람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비닐하우스에선 올망졸망 알토마토가 자라고 있었다. 모종을 심고 물과 비료를 주고 꽃이 피면 무성한 꽃을 따주고 열매를 수확하는 일을 혼자서 했다. 물론 고령의 어머니가 종종 그의 일을 거들었다. 비닐하우스는 가을볕에 익어 후끈거렸다. 어머니는 수확한 알토마토와 배추, 무 등속을 길가 간이막사에서 팔았다. 이따금 지나가는 자가용이 순간 멈추어선 잘 익은 토마토와 농산물을 사 갔다. 번개처럼 손님이 떠난 뒤 노령의 어머니는 조그만 의자에 조용히 앉아 길 저쪽을 하염없이 응시하곤 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한 폭의 정물화 같았다. 그걸 이 사람이 눈여겨 두어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머니 혼자 너무 외로울까 싶어 아들인 자신을 곁에 슬쩍 그려 넣은 그림이었다.

농부 화가 길종갑과 어머니는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 고추다듬는 노인

■ 길종갑은 늘 현재형이다. 하지만…

2022년 가을 춘천 개나리 미술관에서 그림 전시를 할 때 어머니는 길종갑 전시 포스터 전면에 등장했다. 사창리 사람들’이라 이름 붙인 길종갑 전시는 매우 이색적이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길종갑의 오방색 그림은 참으로 독특하다. 관람객들은 그림을 보는 시각이 제가끔 달랐다. 너무 민화풍이라는 둥 샤먼의 냄새가 짙다는 둥 너무 원색적이어서 그림이 어지럽다는 둥 등등. 심지어 어떤 이는 ‘이발소 그림인가’라고 폄하할 정도였다. 사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옛날 이발소에 가면 벽에 걸린 그림 속에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모두 다 들어있었다.

▲ 저녁모임

특히 나는 그런 그림을 아주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대단한 파노라마인가. 길종갑의 그림을 보면(특히 대작에서) 그런 이상과 현실의 세계가 곳곳에 펼쳐진다. 그 세계는 갇혀 있는 듯 보여도 어떤 분출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타고 서로 융합한다. 구름을 통해, 물결을 통해, 산맥의 능선을 통해, 신비로운 골짜기를 통해 서로서로 만나고 어우러진다. 하지만 길종갑의 그림을 평가하는 시각이 각양각색인 것은, 그만큼 길종갑의 그림이 보통의 그림 기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이 색다름은 여타의 그림에 비해 독립적 존재로 인식된다.

오방색은 바로 길종갑의 색채이니까 말이다. 고흐나 고갱의 그림에서도 우린 오방색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그 속엔 자연과 인간의 숨결이 거칠게 내뿜어지거나 이글거린다. 짙은 녹색 그늘에서 밝은 황·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듯이, 길종갑의 그림에도 그런 대비와 대조의 색감이 농밀하게 배어 있다. 여러 색깔을 배합한 혼합색채가 아니다. 원색 그대로의 색이 주는 강렬함이 더욱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을 우린 감각적으로 느끼게 된다. 길종갑은 그림을 그리기 전 되도록 사진을 멀리한다. 몇 번이고 풍경이나 대상을 여러 번 관찰하고 현장에서 작품의 구도를 구상한다. 됐다 싶으면 즉시 캔버스에 앉아 기억의 여행을 시작한다. 흔히 캔버스에 연필로 선을 긋는 밑그림은 그리지 않는다. 바로 그 자리에서 생각조차 놓아버린 듯 물감을 듬뿍 찍어 캔버스를 칠해 나간다. 기억은 그리는 과정에서 다시금 새로운 현상으로 구체화되고 재구성된다. 쉴 새 없이 캔버스를 누비는 붓질은 색을 토하고 뿜어냄과 동시에 서로를 먹고 거부하면서 한 몸으로 결합한다. 이 기법으로 본래 구상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구도와 형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길종갑만의 독특한 의식의 화법이다.

▲ 광란의 춤

직관적이고 비의도적인 이 일관된 작업 태도는 노자의 무위 자연관과 연이 닿아있는 듯싶다. 마치 신들린 그 무엇,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 자연스레 길종갑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길종갑의 그림은 풍경 하나하나, 일상의 그림 하나하나에 신비가 깃들어 있다. 소박함과 솔직함 속에 이런 놀라운 신비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길종갑의 색채에선 깊은 내면의 울림이 들려온다. 그것은 오랜 산맥의 울음 같은, 원초적 본능을 흔들어 일깨우는 소리이다. 반란과 자유,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길종갑의 그림은 평범하나 비범하기 그지없다.

▲ 충성

■ 물결흘림은 섬세하나 도도하다

나는 길종갑의 그림을 독특한 ‘물결흘림’의 기법이라 부르련다. 길종갑의 흘림은 오방색의 원시성을 바탕으로 과거의 역사와 현재 내면의 삶이 함께 투영되는 그림이다. 초기 길종갑의 그림은 그로테스크했다. 화면의 등장인물이 매우 어둡고 괴기스러웠다. 그러나 고향으로의 귀향을 통해 길종갑은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노동을 통한 마을 사람들과의 만남과 소통, 어릴 적부터 늘 대하던 자연의 싱그러운 냄새를 맡았다. 노동을 통한 땀의 의미와 자신이 처한 자궁 같은 고향, 그곳이 길종갑이 추구해야 할 영원한 그리움임을 알았다. 나는 길종갑의 그림에서 노동에서 얻어지는 근육질을 발견한다. 그건 남성적인 에너지요 생성의 일렁임이다. 그는 지금 장엄한 자연의 울림 안에 깃든 사창리 마을 사람들의 애환에 시선을 돌린다. 그 안에 말없이 고추를 따고 다듬어 그 고추를 길거리에 내다 파는 어머니를 보게 된다. 사창리 마을의 대소사와 마을축제, 사창리 마을의 유명 인물인 문수형을 눈여겨보게 된다. 차렷! 충성!

이 모든 이에게, 이 모든 자연물에게, 이 모든 내와 구름과 나무에게, 땀 흘린 이 모든 농산물들에게 길종갑은 차렷 자세로 경례를 올려붙인다. 때로는 길종갑은 슬픈 일도 똑똑히 보고 기록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을의 집이 강제 철거되는 그림에선 침통한 침묵이 무겁게 흐른다. 가축전염병이 창궐하던 날, 애써 기른 돼지와 소가 구덩이에 생매장되는 장면을 오랜 시간 아픔으로 그린 적도 있었다. 가축들이 생매장되면서 외치는 울림은 마을의 두륜산을 진동시켰다.

▲ 두류산 풍경

저는 있는 사실을 그립니다. 그렇다고 그냥 사진처럼 그리진 않습니다. 그 속엔 내면의 고통과 아름다움, 슬픔과 기쁨이 함께 있습니다. 그리면서 소리와 냄새와 색깔이 저절로 만들어진다.

길종갑의 풍속화엔 두런두런 시절이야기, 동네이야기, 한숨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쏟아지는 꿈의 소리가 들린다. 낮잠, 거름 푸는 농부, 1인시위, 광란의 춤, 회닫이, 저녁모임, 대동회, 토마토축제전야제, 고추 다듬는 노인, 파묻히는 가축 울음, 두륜산 풍경, 이상한 풍경 시리즈, 봄에 오는 미세먼지, 엄마의 정원, 쌍둥이 앞 풍경, 이상입니다. 충성!

▲ 엄마의 정원

■ 엄마의 정원

길종갑은 엄마의 정원에서 일하고 밥 먹고 그림 그린다. 이제는 편찮은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시간이 왔다. 올해 길종갑은 고성에서 ‘엄마의 정원’이란 타이틀로 길종갑 기획전을 6월까지 연다. ‘엄마의 정원’이 나들이를 한 셈이다.

길종갑의 마음속엔 언제나 엄마가 그려진다. 저절로 엄마는 길종갑의 그림이 되고, 엄마는 늘 한결같이 길종갑에게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그늘로서 존재한다고 믿는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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