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할머니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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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새로운 호칭이 생겼다.
어떤 친구는 할머니가 되니 폭삭 늙은 노인네가 된 것처럼 느껴져 억울하다고도 하지만 나는 손자가 '할머니'라고 불러줄 때마다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쁨을 느낀다.
물론 손자가 궁금해하는 것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집에 있는 강아지이긴 하다.
하지만 손자가 슬프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괜찮아'라고 다독여주고 그 아이의 작은 성취에도 가장 큰 함성을 지르는 할머니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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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새로운 호칭이 생겼다. 하는 일에 따라서 기자, 작가, 방송인 등으로 불렸는데 이제 친지들 사이에서 ‘시하 할머니’로 불린다. 22개월 전 손자가 생긴 덕분이다. 어떤 친구는 할머니가 되니 폭삭 늙은 노인네가 된 것처럼 느껴져 억울하다고도 하지만 나는 손자가 ‘할머니’라고 불러줄 때마다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쁨을 느낀다. 누워만 있던 신생아에서 아장아장 첫걸음을 떼고 혀짜래기 발음으로 말을 시작하더니 이젠 뛰어다니고 춤도 추고 문장으로 말을 한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 ‘귀엽다’ ‘사랑스럽다’ ‘예쁘다’란 표현으로는 부족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수시로 딸에게 손자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내 달라고 비굴하게 구걸하고 카카오톡으로 영상통화를 한다. 물론 손자가 궁금해하는 것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집에 있는 강아지이긴 하다. 눈 뜨면 휴대폰에 저장된 손자의 사진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유난히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손자랑 주말에 놀아주면 어깨와 허리에 파스를 붙여야 한다.
그런데도 그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환해지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손주는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무조건 사랑만 해줄 수 있는 존재여서가 아닐까.
딸을 키울 때는 나도 미숙한 초보 엄마였고 이 아이가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을지 두려웠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로 태어난 듯 아이를 잘 키우고 공부도 잘 시키고 각종 놀이시설에도 잘 데리고 다니는 엄마들을 볼 때마다 자격지심과 죄책감이 들었다.
직장에서 몸이 파김치처럼 축 절여져 집에 왔는데 딸이 달려와 안기면 잠시 구원받은 느낌이었지만, 놀아 달라거나 책을 읽어 달라고 몇권씩 들고 오면 어떻게 하면 빨리 재울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당시 남편은 저녁 시간 대부분을 술집이나 상갓집에서 마치 정서적으로 총각인 것처럼 보냈다. 엄마의 품과 대화를 간절히 바라는 딸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보면서 난 행복감보다 애틋하고 짠하고 미안한 마음에 늘 죄인 같았다. 또 과연 내가 이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후원하고 아이의 꿈을 키워줄 수 있을까 불안했고 책임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딸은 엄마의 부실함을 파악하고 스스로 잘 자랐다. 내 복이다.
그런데 손자는 그냥 예뻐하고 귀여워해주고 손뼉 쳐주고 축복만 해주면 된다. 물론 선물이나 장난감 등 비용이 들기는 한다. 첫 국민연금을 받았을 때도 손자에게 줬다. 하지만 손자의 대학 입학금, 결혼 자금 등은 내가 꼭 책임질 일은 아니다.
손자 백일 기념으로 헝겊 인형을 만드는 공방에 가서 한땀 한땀 손바느질로 소년 인형도 만들었다. 요즘은 책을 좋아하는 손자 덕분에 각종 동화책을 읽어주느라 거의 동화구연가 수준이 됐다. 춤을 춰주면 까르르 웃는 손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어 손자에게 내가 재롱을 떤다. 덕분에 동심으로 돌아가 동안은 아니지만 표정도 밝아졌다.
인자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는 아니다. 하지만 손자가 슬프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괜찮아’라고 다독여주고 그 아이의 작은 성취에도 가장 큰 함성을 지르는 할머니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유인경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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