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암혈지사(巖穴之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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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벗어난 농어촌 방방곡곡에는 숨어 있는 고수들이 많다.
발효식품에 도통하여 건강한 먹거리를 연구하고 만드는 사람, 인문학 수준이 경지에 올라 어느 학자와 만나도 논리와 식견이 밀리지 않는 사람, 재주와 기술이 출중해 시중에서 볼 수도 없는 높은 수준의 예술품을 만드는 사람, 이렇게 자기 능력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산림의 고수를 암혈지사(巖穴之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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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 탁월하고 혜안 지혜로워
세속에 학벌도 연줄도 없지만
과거·미래 경계없이 넘나들어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위대한 흔적 남긴 진정한 영웅
도시를 벗어난 농어촌 방방곡곡에는 숨어 있는 고수들이 많다. 일명 방외지사(方外之士)다. 세속의 중심에 있지는 않지만, 자유롭게 자기 삶을 잘 꾸리며 제도권(方) 밖(外)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발효식품에 도통하여 건강한 먹거리를 연구하고 만드는 사람, 인문학 수준이 경지에 올라 어느 학자와 만나도 논리와 식견이 밀리지 않는 사람, 재주와 기술이 출중해 시중에서 볼 수도 없는 높은 수준의 예술품을 만드는 사람, 이렇게 자기 능력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산림의 고수를 암혈지사(巖穴之士)라고 부른다.
이들은 비록 바위(巖)와 동굴(穴)에 기대어 소박하게 거처를 마련하고 살아가지만 만만하게 대할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안목은 탁월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혜안은 지혜롭다. 비록 세속의 학벌과 연줄은 없지만, 자연과 소통하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고금무애(古今無碍)의 경지에 이른 자다. 이들은 타인의 평가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다.
사마천은 <사기> ‘백이열전’에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암혈지사야말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일 수 있다고 말한다. 역사 속에 다뤄지는 위대한 사람들은 다소 과대포장이 된 경우가 많아서다. 지위와 권력, 학벌과 연줄로 본질을 숨기고 신화와 전설로 포장해 시대의 영웅이 되거나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름 없는 바위나 동굴 같은 곳에서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흔적을 남기고 간 사람들을 역사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 역사가로서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사마천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삶을 살아갔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역시 암혈지사라고 말한다. 그들은 세속과 단절하여 수양산으로 들어가 자기 소신을 지키며 살아갔던 사람들이다. 이들이라고 어찌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기 인생에 대한 회한이 없었을까? 그러나 이들은 그것도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승물(乘物)의 경지에 이르렀다. 공자라는 성현이 그들을 추앙해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다면 영원히 역사의 뒤편에 묻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암혈지사로 남았을 것이다.
백이와 숙제는 공자와 같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기에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무광(務光)이나 변수(卞隨) 같은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의롭게 살다 갔지만 그 흔적은 역사책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사마천은 역사에 기록된 자와 기록되지 않은 자의 구별만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어쩌면 위대함이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이어 나갔던 암혈지사의 것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참 많다. 그러나 기록이나 각종 미디어를 거쳐 전해지는 이름은 실제보다 과대 포장되기도 하고, 명실이 상부하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심지어 사실이 위조되기도 한다. 천재와 영웅, 위대함과 웅장함은 진실을 숨긴 허위의 허상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어떤 사람보다도 역사적인 삶을 살아갔던 암혈지사, 그들은 초야에 묻혀 역사 밖의 사람으로 묵묵히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고 긍정한 자다.
들에서 밭을 가는 농부들, 산에서 나물을 캐는 아낙들, 이들이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영웅의 시대가 끝나고 우리의 시대가 다가온 봄이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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