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에 노천탕을?" 실용과 파격이 흐르는 건축가의 양평 주택 [집 공간 사람]

손효숙 2023. 5. 12.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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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숲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주택, 노로재의 정면.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현관 귀퉁이에 냉장고와 벽난로를 놓고 집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입구에 부티크 호텔에나 있을 법한 편백나무 욕실을 들인 집. 여느 주택과는 시작부터 다른 전개를 보여주는 이 집은 건축가 김주원 하우스스타일 대표가 자신을 위해 지은 첫 주택이다. 경기 양평군 대흥리에 위치한 '노로재(대지면적 368㎡, 연면적 198.53㎡)'는 26년 차 건축가의 내공이 녹아든 집. 그러나 그간의 모든 문법을 저버린 듯 새롭고 파격적으로 지어졌다.

설계자이자 집주인인 김 대표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해 2002년 MBC 프로그램 '러브하우스' 건축디자이너로 얼굴을 알렸다. 2012년부터는 건축사사무소를 꾸려 주택 설계를 전문으로 해왔는데 주택 수백 채를 설계한 건축가에게도 '내 집' 짓기는 쉽사리 이룰 수 없는 로망이었다고 한다.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생각하던 차에 운 좋게 이 땅을 만났죠. 택지 개발 후 남은 자투리 숲을 접한 땅이었어요. 숲을 본 순간 여기구나, 지금이구나 싶더라고요."

수직의 창으로 채운 건물의 입면. 과감하게 열린 창으로 집 안에서도 사계절 풍부한 뷰를 즐길 수 있다.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실용적인 파격...주택의 궁리를 담다

폴딩도어로 시원하게 열리는 1층 현관은 안이면서 밖인, 중첩된 공간이다.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건축가의 집이니 익히 해오던 대로 지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건축주로서 좀 더 실용적이면서 새로운 공간을 상상했다. "집은 사는 사람에게 맞춘 공간이잖아요. 건축적 행위로서 땅을 읽고 공간을 배치하는 게 기본이지만 그 이후엔 사는 사람의 생활을 다양하게 담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하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경험을 녹여낸 집이에요."

남다른 아이디어로 완성된 노로재는 평범해 보이는 외관과 다르게 안팎으로 들고 나기를 반복하는 특이한 실내 평면을 갖게 됐다. 1층엔 널찍한 현관과 낮은 거실, 높고 탁 트인 주방이, 2층엔 전망 좋은 안방을 포함해 세 식구의 방이 나란히 놓였다.

가장 특별한 공간을 꼽으라면 단연 현관이다. 보통 현관은 신발을 신고 벗을 수 있는 작은 공간과 신발장으로 구성되는데, 이 집에선 전혀 다른 구조다. 이 집의 현관은 잠금장치가 달린 여닫이문이 아닌 접이식 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나오는 널찍한 공간이다. 일명 '선룸(Sun Room)'라고 불리는 공간엔 신발을 신은 채로 앉아 쉴 수 있는 마루와 의자, 테이블이 있고 한 귀퉁이엔 음료수와 주류를 가득 채운 냉장고와 벽난로가 놓여 있다.

이 독특한 공간에 대해 그는 "완전한 바깥과 완전한 실내의 중간 영역인 공간"이라며 "폴딩도어의 특성상 기밀이나 단열 기능이 다소 떨어지지만 벽난로를 설치해 실내 마당으로 쓸 수 있고, 외부인도 부담 없이 드나드는 외부 거실로 활용할 수도 있어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집을 드나드는 입구와 잠시 머무르며 곁불을 쬘 수 있는 휴식 기능을 결합한 신개념 현관이다. 택호를 '길가의 화로(路爐齋)'로 한 이유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벽을 미닫이문으로 만들어 개폐가 가능한 욕실의 모습. 편백나무로 마감한 욕실에는 넓은 욕조와 간단한 샤워시설이 갖춰져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욕실 오른쪽 복도를 지나가야 한다.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하지만 이 공간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마루와 접한 편백나무 욕실이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오픈된 욕실을 마주하는 셈인데 폴딩도어를 활짝 열어젖히면 외부에 노출된 노천탕으로 변신한다. 샤워시설과 커다란 욕조를 갖춘 욕실은 벽을 미닫이로 제작해 사용하지 않을 때는 닫아 숨은 공간이 된다. "주택에서 상대적으로 쓰임이 덜한 현관과 다용도실 공간을 통합하고 즐길 수 있는 욕실을 결합해 공간 활용도를 높인 거예요. 기능과 명칭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공간이 훨씬 쓸모 있고 재밌어져요."

이 집에는 이 공간을 포함해 거실이 무려 네 개가 있는데 쓰임이 다르다. 김 대표가 재택근무를 하는 지하 사무실은 작업 공간이자 공적인 용도로 사용한다. 선룸를 통과하면 등장하는 1층 실내 거실은 주로 TV나 영화를 보는 휴식 공간으로 쓰고, 20명까지도 앉을 수 있는 규모로 조성한 덱(deck) 거실에선 지인들을 초대해 야외 모임을 즐긴다. 그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으로 설계한 집"이라며 "삼삼오오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서 손님들이 며칠씩 묵어도 지루하지 않다고 한다"며 웃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건축주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지하 작업실. 큰 테이블이 놓인 작업실은 미팅 등 공적 거실 역할을 한다.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지하 작업실과 1층 주거 공간을 연결하는 나선형 철판 계단은 그 자체로 아트 오브제다. 3.9m 높이의 좁고 기다란 공간에 휘감기는 계단의 색과 형태가 압권이다.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시시각각 변하고 확장하는 집

숲을 향해 북측 창을 크게 열어 놓은 덕분에 1층 공간이 늘 밝다. 건축주가 가장 좋아하는 뷰를 만드는 공간.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특별한 현관을 지나 실내 공간에 들어서면 흡사 숲속에 있는 듯한 분위기에 또 한번 놀란다. 빼곡한 잣나무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다이닝 공간은 김 대표가 가장 애정하는 곳. 22평에 불과한 공간이 왜 50평만 해보이나 했는데 이유는 '벽을 채운 창'에 있었다. 3.4m 높이 북측, 서측 벽면을 말 그대로 가득 채운 3m 높이의 수직 창은 보통 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스케일이다. "건축적 언어로 가장 잘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잣나무 숲이었죠. 이 집에서만 누릴 수 있는 숲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창을 내고 공간을 배치했는데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주택의 안정적인 스케일에 비해 훨씬 드라마틱해졌어요."

숲을 따라 급격한 경사가 있는 땅 모양에 맞춰 집을 앉히다 보니 생긴 내부 단차는 집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그는 "상대적으로 바닥이 올라와 있는 거실은 더욱 아늑하게, 계단을 서너 개 내려가면 나오는 부엌과 다이닝 공간은 층고가 높아져 개방감이 극대화되는 효과가 있다"며 "벽 없이 한공간으로 연결됐지만 눈높이와 보이는 풍경이 다르니 공간마다 분위기가 다 다르다"고 했다.

각별히 신경 쓴 조경과 차경도 눈길을 끈다.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설계 초반부터 계획한 조경에는 "현관 욕실에서 바라보이는 앞마당에 배롱나무를 심고, 집을 둘러 만든 산책길 곳곳에 모과나무, 영춘화 등 계절별로 빛깔이 다른 나무와 화초를 둬 사계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안방 침실에는 오히려 과감하게 창을 내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산과 오밀조밀 모여 있는 마을의 풍경을 끌어들였다. "아파트에서 생활이 지루한 건 풍경이 똑같기 때문이에요. 주택은 달라야 해요. 나무에 꽃이 피었다 푸르러지고, 마른 가지만 남았다가 문득 눈이 소복이 쌓이는 순간까지, 계절따라 매일 변하는 풍경을 보고 즐길 수 있죠."

내부와 외부를 오가며 부담 없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1층 테라스.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숲과 가깝게 소통하기 좋은 1층 외부 테라스. 잔디로 마감해 자연을 더 밀도 있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가끔 보면 그대로지만, 매일 보면 다르다"

위로 높게 뻗은 잣나무 숲을 따라 수직으로 세워진 집의 최상층부는 다락이다. 박공 지붕으로 구성된 아담한 공간이 나무집에 들어 있는 듯한 분위기를 낸다.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숲멍'으로 아침을 시작한 지 일 년째. 벽을 숲으로 과감하게 열어젖힌 덕분에 가능한 생활이다. 김 대표는 "이 집에 살면서 숲을 관찰하는 루틴이 자연스레 생겼다"며 "인적 없는 숲에 햇살이 스미고, 나뭇잎이 미세하게 흔들리거나 작은 동물들이 오가는 모습을 시간을 들여 관찰하면서 꽉 찬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최근에는 '탐조'에 푹 빠져들었다는 김 대표. 요즘 그는 알람 대신 산새 소리에 눈을 뜨고, 식탁에 앉아 따뜻하게 내린 커피를 마시며 둥지를 튼 아기 새의 안녕을 살핀다. 다락에 마련한 홈짐(gym)에선 운동을 하며 대여섯 종류 산새의 일과를 체크하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자연은 가끔 보면 언제나 그대로잖아요. 그런데 매일 보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어요. 움직일 수 없는 집을 변화무쌍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자연이고요. 변화가 있는 집과 없는 집, 살아 보니 제법 큰 차이가 있어요."

시원하게 열린 창으로 원경을 끌어들이고 채광에 부족함이 없도록 한 안방. 박영채 건축사진작가 제공

양평=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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