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다시 쓴다는 건, 후회 아닌 새 힘으로

진달래 2023. 5. 1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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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일곱 번째 소설집 '각각의 계절'
과거 돌아보며 얻는 새로운 삶의 힘
2018~2022년 발표된 단편 7편 수록
권여선 작가. ⓒ정멜멜 문학동네 제공

"그러나 과거를 반추하면 할수록 내게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시절의 내가 도무지 내가 아닌 듯 무섭고 가엾고 낯설게 여겨진다는 사실이었다.……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문득 돌아본 수십 년 전 일이 훼손된 필름 같은 때가 있다. 기억의 성근 구멍을 메우려 안간힘을 쓰면 오히려 그 장면 속 자신은 더 생경해진다. 조금은 딱하고 조금은 난해한 과거의 나. 단편소설 '기억의 왈츠'의 이 대목을 읽으면 그런 순간이 떠오른다. 권여선 작가의 차분하면서도 엄정한 문장은 그 난감한 감정에 몰입하도록 독자들을 붙든다. 불완전한 기억을 파고드는 질문들 사이를 지나면 우리는 어디에 당도할까.

등단 27년을 맞는 권여선(58)의 일곱 번째 소설집 '각각의 계절'은 그 질문을 좇아가는 이야기들을 모았다.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2021)인 '기억의 왈츠',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2019, 2020)인 '하늘 높이 아름답게' '실버들 천만사' 등 2018~2022년 발표된 단편 일곱 편이 묶였다.

게티이미지뱅크

'기억의 왈츠'의 화자 '나'는 동생 부부와 교외에 있는 숲속 식당에 갔다가 30여 년 전 대학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곳이 당시 어울렸던 친구들과 온 적 있는 식당인 것 같아서다. 그 무리에는 '애매한 연애'를 했던 또래 남자 '경서'도 있었다. 복잡한 인생의 사건들로 인해 그와 자연스레 멀어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기억을 되짚어보니 "세상을 다 산 듯한 꼴"로 살던, "감정적으로 완전히 폐허였고 욕망이 소진된 폐광"이었던 스물네 살 '나'의 문제가 보인다.

이별 직전 학기, 경서는 중학교 때부터 썼던 일기장들을 나에게 보내왔다. "마치 미사일의 발사 버튼을 누르는 심정"으로 보냈다는 편지와 함께. 하지만 나는 당시 그것을 폭탄처럼 느꼈다. 제대로 읽기는커녕 학기 내내 방구석에 밀어놓았다. 다 읽었으면 돌려달라는 굳은 얼굴의 그에게 심지어 "다시 돌려줘야 하는 거였느냐"는 무심하다 못해 비수 같은 말을 던졌다.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자신을 알아봐 주고 이해하려 한 이에게 그렇게 존중도 예의도 없이 굴었다.

첫 질문은 그때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에서 시작한다. 더듬거리며 기억들을 되새겨 보면 물음표는 결국 나를 향한다. 대체 나는 왜 그랬나. 다른 수록작들 속 인물들도 비슷한 의문 속에 각자의 기억을 다시 써 내려간다. 지극히 현실적인 모녀의 이야기인 '실버들 천만사'의 '반희' 역시 그렇다.

이혼 후 혼자 사는 반희는 딸 '채운'이 자신을 닮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리를 두고 지내려 애쓴다. 그런 사랑법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건 1박 2일로 떠난 모녀의 여행 날이다. 언젠가 엄마가 집을 나갈 거라는 불안을 안고 살았던 딸의 어린 시절 기억을 처음 들었다. 이제는 다가올 엄마의 죽음이 생각날 때면 숨을 못 쉬겠다고 호소하는 채운. 모녀간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사랑해서 얻는 게 왜 이런 악몽이냐는 울부짖음이 이어진다. 막연한 두려움에 "채운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 했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던 것.

각각의 계절·권여선 지음·문학동네 발행·276쪽·1만5,000원

기억을 다시 쓰고 나면 부끄러움이 남는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켜켜이 포개온 왜곡과 오류의 껍질을 벗겨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 권여선의 소설에서 그 용기의 결말이 허무와 후회는 아니다. 살아갈 힘을 얻는 듯한 희망을 선사한다. 나는 경서가 제안한 약속의 날을 챙겨보겠다고 다짐하고, 반희는 수천수만 가닥 실을 밧줄로 꼬아 단단히 붙들어 매자고 결심한다.

제목 '각각의 계절'은 수록작 '하늘 높이 아름답게'의 한 대목이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그 시절 우리를 지탱해 준 힘이 지금의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순 없다. 이 순간에 필요한 건 또 다른 무엇이리라. 그래서 매번 어렵지만 그렇기에 언제나 시작이 있다. 작가는 독자에게 응원을 건네려 한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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