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저 드높고 무거운 짐

기자 2023. 5. 1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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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차리러 가는 당신 때문에

나는 살았다

흙 묻은 손으로 씻어준

알갱이들 때문에

밥을 차리러 간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이어가며 살 수 있었다

쌀을 구하려 손발이 닳던 노동 때문에

화구에 불을 넣고 연기를 쬐던

주름진 노역 때문에

수심이 깊은 밥주걱 때문에

개수대로 쓸려가는 수챗물처럼

아무것도 아닌 인생 때문에

밥물이 한소끔 끓을 시간만큼도

못 살다 간 인생 때문에

우리는 살 수 있었다

그러니

들어가 밥이나 하라는 말은

쉰밥만도 못한 말

밥을 버리라는 말

밥의 자식이 아니라는 말

불내의 식구가 아니라는 말

- 시, ‘밥이나 하라는 말’, 문동만 시집

<설운 일 덜 생각하고>

김해자 시인

얼었다 녹은 자국인 듯 잎이 불그스레한 고추 옆에 쇠뜨기와 쑥을 베어 덮어주었다. 잎 하나가 팔뚝만 한 소루쟁이는 한 포기만 베어도 고추 열 주는 덮어줄 이불이 된다. 밭을 나오다 보니 고들빼기 하나에 노란 꽃 백 송이 남짓 피어 있다. 자세히 보니 꽃잎을 닫은 꽃봉오리도 피어 있는 꽃만큼 많다. 작은 벌 대여섯 마리가 이 꽃 저 꽃 사이를 열심히 다닌다. 벌도 먹고사느라 저리 열심이다.

간만에 고향에 다녀왔다. 동행한 둘째 오빠는 30년 이상 한 직장에서 월급 받고 살다 퇴직 후 택시 운전을 한다. 밥 먹고 식당에서 나오다 오빠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식당일 하는 사람들 정말 존경스럽다고. 남의 입에 밥 넣어주는 일이 자기 살과 뼈를 갈아넣는 거라고. 택시 타는 손님들 얘기를 들으면서 요새 자영업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실감한다고. 가게 운영하는 사람들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봐진다고.

고향에 다녀온 지 일주일 후,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 양회동씨가 분신 후 사망했다. 5월1일, 노동자의날이었다. “무고하게 구속되신 분들 제발 풀어주”고, “제발 윤석열 정권 무너트려 주”라는 게 마지막 길을 가는 사람의 바람이라니. 죽음으로 억울함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은 병들었다. “수심이 깊은 밥주걱”들이 제발 좀 진실을 봐 달라고 눈물로 호소해야만 하는 세상은. “주름진 노역”을 “개수대로 쓸려가는 수챗물처럼” 간주하는 자들은 국민들 위에 있을 필요가 없다. 시간에 쫓기며 졸음 참으며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누군가의 발과, 서너 시간 쪽잠 자고 먼길 달려가는 운전대 잡은 손들을 “아무것도 아닌 인생”으로 생각하는 위정자들은 자격이 없다. 월셋집에 남겨질 아이들을 생각하며 피눈물 흘리며 유서를 쓰는 사람의 눈망울을 되짚어보지 못하는 자들은.

‘밥’을 위해 노동자와 농민이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면 단단히 탈이 난 사회다. 16일 파업하면 6개월 이상 허덕대야 하는 ‘할부인생’들이 오죽하면 투쟁을 했겠는지 헤아리지 못하는 자들은 “손발이 닳던 노동”을 모른다. 헌법과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는 쟁의의 자유를 ‘담합’으로 매도하며, 들어가 일이나 하라는 것은 “쉰밥만도 못한 말”. ‘법’과 ‘질서’를 핑계삼아 돈으로 협박하고 법으로 공갈치는 명령의 말은 “밥을 버리라는 말”. 범죄자와 속죄양을 만들고 구속과 압수수색으로 시민을 공격하는 자들은 “밥의 자식이 아니”다.

영화 <아바타>에는 “I see you”라는 대사가 자주 나온다. “나는 당신을 본다”는 말은 내 눈에 비친 당신의 슬픔과 고통과 공포와 사랑을 느낀다는 것. 진정 본다는 것은 나와 이어진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한다는 것. 숱하게 죽음을 생각했다는 사람들과 실제로 죽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숱한 사람들의 절규를 듣는다는 것. 동체대비(同體大悲)의 피눈물을 느끼지 못한 채, 저 높은 곳에 버티고 앉아 있는 자들은 국민의 무거운 짐이자 멍에. 사람의 밥을 함부로 취급하는 자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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