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삼국유사와 해파랑길
속초로 가는 입구인 미시령터널 톨게이트에는 예전에 이런 팻말이 있었다. ‘강풍에 현금주의.’ 여기서 현금은 동전이 아니다. 태백산맥 길목을 지키는 심술궂은 높새바람이 낚아챌지 모르니 통행료 낼 때 이른바 배춧잎을 조심하라는 주의사항이다. 아이코, 종이돈 다시 말해 지전(紙錢)이라니! 저 말을 고리로 고속도로에서 삼국유사 속으로 미끄러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생사(生死)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道) 닦아 기다리겠노라.” 단 열 줄로 인간의 윤회하는 층층의 생을 두텁게 묘사한 신라의 향가, 오누이의 도타운 정을 사무치게 그려낸 제망매가의 세계로.
한 가지에서도 잎과 꽃으로 다르고, 같은 잎인데도 그 크기와 상태는 또한 다 다르다. 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齋)를 올릴 때 저 향가를 지어 불렀더니, 돌연 바람이 일어 저승길 노자로 바친 지전(紙錢)이 서쪽으로 날려갔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한다.
용도는 사뭇 다르지만 지전이라는 단어로 지금과 신라를 연결하는 삼국유사는 신통하다.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땅속, 물속, 하늘로 전개되는 장면들이 굴러다닌다. 그러니 삼국유사로 인해 우리나라는 그 영토가 최소한 8배는 확장된 셈이다. 덕분에 나는 전혀 다른 나라의 어리둥절한 백성이 되었고.
지전이 안내하는 서쪽은 어디인가. 나는 서에서 동으로 와서 속초에서 오른편으로 꼬부라져 남으로 뻗은 해파랑길을 걷는다. 탁, 하면 목탁이요 척, 하면 삼척이다. 삼척 지나 이정표를 확인하니 수로부인길이다. 수로는 水路이니 물의 길이다. 여기는 벌써 삼국유사의 신화가 발밑에 흥건해지는 곳.
뭍과 물의 경계를 걸어가니 후진항이 나오고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한 신라 장군, ‘이사부의 길’이 시작된다. 그 길 초입에서 바다 바닥을 긁는 작업이 한창이다. 천년을 견디다가 비로소 바깥 구경을 하는 물밑의 고운 흙들. 우람한 팔뚝의 포클레인이 툭툭 검은 모래흙을 한 무더기씩 부려놓을 때마다 신라인의 모습이 빚어지고 있었다. 이사부 장군으로, 수로부인으로, 견우노인으로, 월명의 누이로. 아아아, 처용으로!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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