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매화와 무릎 꿇린 히틀러

기자 2023. 5. 1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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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익명의 조선도공과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만난 적이 없다. 백자와 그의 작품 또한 아무 관계가 없다. 시간적으로 조선과 현대인 데다 공간적으로도 동양과 서양이 너무 멀다. 생각의 뿌리도 다르다. 일원론을 바탕으로 물질보다 관념을 우선한 조선 사람과 그 반대인 이원론적 사고를 하는 현대 서양인이다. 작금 한국사회의 집단적인 심리구조까지 감안하면 두 전시는 한 지붕 두 가족이다. 국립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렇다. 국립박물관에는 현대가 없고,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역사가 없다. 더구나 진보와 보수, 남과 북, 세대와 젠더, 친일과 항일, 정치와 예술, 서예와 미술, 한글과 한자…. 이 모든 영역이 칸막이 쳐진 갈등의 도가니다.

하지만 리움이라는 ‘세계(世界)’, 즉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인 세(世), 동서남북중이 하나인 계(界)에서는 생면부지의 도공과 카텔란이 작품으로 내왕하며 새로운 해석의 언어를 발명해 내고 있다. 이것은 우연이지만 필연이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반드시 일어나고 마는 양자역학의 세계를 닮았다. ‘슈레딩거의 고양이’처럼 상자뚜껑을 열어 관찰하기 전에는 고양이의 생사를 모르듯, 전시장 안에서는 관객들과 작품들이 횡설수설하며 애매모호하기도 하지만 당연하기도 한 해석을 생산해낸다.

185점의 도자기는 미술책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조선그림책이다. 도자기에 화석처럼 박혀 있던 매란국죽과 소나무 용이 살아 숨 쉬는가 하면 큐비즘에다 기하추상의 필획에서 순백의 미니멀아트까지 다 구현되어 있다. 조선의 끝자락에서 붉은 노을 속 구름을 박차고 나는 ‘백자청화동채운룡문병’ 속 비룡(飛龍)은 허공을 날다 벽에 처박힌 카텔란의 천마(天馬)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여기서는 국경도 이데올로기 경계도 다 허물어진다.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을 표현한 카텔란의 ‘아홉번째 시간’이나 로비에 설치된 노숙자 조각은 세상의 부조리를 유쾌하게 비틀어 낼 대로 비틀어 낸다. 이 지점에서는 1980년대 한국 민중미술의 유니버설 도약판으로 읽힌다.

모든 시기 도자기에 등장하는 매화는 조선의 500년 매화밭을 거니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런 매화와 무릎 꿇은 히틀러(사진)는 표면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군자의 절개와 독재자의 참회언어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전쟁을 직시하면서 말문이 열린다.

백자의 여백은 임진 병자 양난과 같은 혹독한 전쟁터이고, 히틀러의 부릅뜬 두 눈은 화이트큐브 너머 아우슈비츠 살육현장을 응시한다. 매화는 조선이다. 도학자 퇴계에게 매화는 형님이다. 국모 명성황후가 옥호루에서 휘호해낸 ‘옥골빙심(玉骨氷心)’은 조선의 마음 그 자체다. 하지만 조선의 매화는 일제총칼에 무참히 꺾이고 베어져 스러졌고, 여전히 남북분단인 오늘 한국은 미완의 독립상태다.

며칠 전 5월8일, 김건희 여사와 기시다 유코 여사가 리움에서 열리는 <조선백자 - 군자지향>을 관람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옆방의 화이트큐브에서 카텔란은 일왕보다 먼저 히틀러 무릎을 꿇리고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참회는 당사자 스스로 꿇은 무릎이다.

매화는 히틀러나 일왕보다 약하지만 히틀러도 일왕도 결국 매화를 이기지는 못한다. 유약한 것이 예술이지만 강강의 정치를 각성케 하는 것 또한 예술임을 카텔란이 보여주고 있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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