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히로시마서 해야할 일…강제동원 원폭피해 해결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고 해서 현안과 미래 협력을 위해 한 발짝도 발걸음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는 그런 인식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5월7일 오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마친 뒤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일 확대 정상회담 머리발언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미국 국빈방문을 앞둔 4월24일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내놓은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발언을 떠올리게 한다. 윤 대통령의 ‘소신’이란 뜻인데, 문제는 따로 있다. 그간 과거를 볼모로 현안과 미래 협력을 거부해온 것은 정작 일본이다.
“역사 팔아 관계 개선? 어불성설”
2018년 10월 말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일본 전범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확정판결을 내놓자 일본 쪽은 격하게 반발했다. 아베 신조 당시 총리는 “이 판결은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단이다. 일본 정부는 의연히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고노 다로 당시 외상은 이수훈 주일 한국대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일-한 우호 협력 관계의 법적 기반(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근본부터 뒤집는 것으로, 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이후에도 일본 쪽은 “한국이 해법을 가져오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가 ‘계승’하겠다고 재차 밝힌 김대중-오부치 선언(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1998년 10월8일)은 ‘과거 직시’와 ‘미래 지향적 협력’을 두 축으로 한다. 편차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후 과거사 문제와 미래지향적 협력 사안을 분리 대응하는 이른바 ‘투트랙’ 접근이 역대 한국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 기조로 자리 잡았다. 문재인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법원 판결 이후 꽉 막힌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2019년 6월28~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리기 열흘 전 강제동원 배상 문제와 관련한 대안을 제시했다. 전범기업을 포함한 일본 기업과 한국 기업의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내용이 뼈대였다. 일본 쪽은 “일본과 한국 관계의 법적 기반이 돼 있는 약속을 위반한 상황을 시정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일본 정부는 G20 정상회의 폐막 직후인 같은 해 7월1일 한국에 대한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을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명백한 보복이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일본학)는 “문재인 정부 때는 서로 얼굴도 안 보는 국면이었으니, 한-일 정상 간 만남을 폄훼할 순 없다. 다만 과거사 문제에 진전이 없으면 미래 협력도 없다고 고집한 건 일본이다. 역사를 팔아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일본은 이를 ‘선례’ 삼아 차기 정권에 ‘약속을 지키라’고 밀어붙일 것이다. 대통령의 역사 인식이 국민 다수의 상식과 거리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는 당시 혹독한 환경 아래 다수의 분들께서 대단히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굉장히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기시다 총리가 5월7일 내놓은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두고두고 곱씹을 대목이 많다. ‘혹독한 환경’은 누가 만든 것이고, ‘대단히 힘들고 슬픈 경험’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더구나 정상회담 결과를 밝히는 자리임에도 기시다 총리는 발언의 주체를 ‘일본 총리’가 아닌 ‘개인 기시다’로 한정했다. ‘비공식적’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결국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말치레일 뿐이란 얘기다. 그럼에도 대통령실 관계자는 정상회담 뒤 기자들과 만나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의 과거사 관련 언급을 듣고 ‘한국이 먼저 요구한 바 없는데 먼저 진정성 있는 입장을 보여줘서 감사하다. 한-일 미래 협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기념공원 방문에…윤 “진정성 있는 행보”
기시다 총리는 5월19~21일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기간에 윤 대통령과 함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하자는 제안도 했다. 공원 안에 있는 한국인 원폭피해자 위령비도 둘러보기로 했다. 이를 두고 대통령실에선 “앞으로도 말과 행동으로 과거사에 대해서 진정성 있는 행보를 이어가겠다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반응을 내놨다. 역시 쉽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편안하게 잠드소서. 잘못은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한가운데 자리잡은 원폭 위령비에 새겨진 글귀다. 누구의, 어떤 ‘잘못’을 말하는 건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잘못인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의 잘못인가? 기시다 총리의 ‘가슴 아프다’는 발언처럼 질문이 꼬리를 물 수밖에 없는 글귀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12월23일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발간된 보고서가 나왔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피해에 대한 진상조사’란 제목인데,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를 중심으로’란 부제가 붙어 있다. 보고서는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평소 조선인이 대량으로 유입될 정도로 주목되는 지역이 아니었다. 대개 경제적 이유로 도일하는 조선인은 오사카를 필두로 도쿄, 요코하마 등 대도시에 집중했다. 그러나 전시기에 들어서자 두 지역을 향한 조선인의 유입이 급속히 증가해, 예를 들어 1931년 ‘만주사변’에서 비롯된 15년간의 전쟁 기간 중 히로시마는 11.8배, 나가사키는 12.5배에 해당하는 조선인의 대량유입이 있었다. (…) 따라서 그 인구유입이 강제동원과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동 지역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피해가 동 지역의 전체 조선인 중 강제동원된 조선인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보고서는 1945년 8월 미군이 투하한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인한 피폭자를 히로시마 42만여 명, 나가사키 27만여 명 등 줄잡아 70만 명으로 집계했다. 이 가운데 23만여 명이 해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조선인은 히로시마에서 5만 명, 나가사키에서 2만 명 등 약 7만 명이 피폭됐다. 피폭자 10명 가운데 1명이 조선인이란 뜻인데, 보고서는 조선인 피폭자의 절반가량을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로 추정했다. 피폭으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는 약 4만 명으로 알려진다. 눈여겨볼 점은 전체 피폭자 사망률(33.7%)에 견줘 조선인 피폭자의 사망률(57.1%)이 눈에 띄게 높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렇게 적었다.
“원폭으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는 일순간에 초토화됐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시가지를 벗어났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도 원폭 피폭에서 예외일 수가 없었다. (…) 그러나 조선인들의 상황은 일본인보다도 더 참담했다. 부상을 치료받고자 찾은 진료서에서 조선인이라는 신분이 드러나면 ‘죽일 듯이 째려보는’ 군의관 때문에 진료소를 뒤로하는 상황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시내에서 화물을 운반하다 원폭으로 심하게 화상을 입은 남편을 위해 임시진료소에 약을 타러 간 어느 부인은, “니들에게 줄 건 없어”라며 냉정하게 내쳐지는 바람에 울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한다.”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배상청구권
헌법재판소는 2011년 8월30일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3조 부작위 위헌확인’ 소송(2008헌마648)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려,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과는 별개로 한국인 원폭피해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청구권이 있음을 확인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불법적인 강제징용 및 징병에 이어 피폭을 당한 후 방치돼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진 채 비참한 삶을 영위하게 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는 배상청구권은 헌법상 보장되는 재산권일 뿐만 아니라, 그 배상청구권의 실현은 무자비하고 불법적인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과정에서 도구화되고 피폭 후에도 인간 이하의 극심한 차별을 받음으로써 침해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사후적으로 회복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므로, 침해되는 기본권이 매우 중대하다. (…) 결국 이 사건 협정 제3조에 의한 분쟁해결절차로 나아가는 것만이 국가기관의 기본권 기속성에 합당한 재량권 행사라 할 것이고, 피청구인의 부작위로 인해 청구인들에게 중대한 기본권의 침해를 초래하였다 할 것이므로, 이는 헌법에 위반된다.”
헌재의 위헌 결정에도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는 원폭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한일청구권협정 3조에 따른 분쟁해결절차를 개시하지 않았다. 당시 소송을 주도한 최봉태 변호사(법무법인 삼일)는 “위헌 상태가 12년째 지속되고 있다.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와 함께 한국인 원폭피해자 위령비를 방문하는 것을 계기 삼아 헌재가 위헌으로 결정한 부작위(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일부러 하지 않음)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전범기업에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명한 대법원 판결을 ‘제3자 변제’란 방식으로 뒤엎은 윤석열 정부가 또다시 ‘과거’ 앞에 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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