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러는 5월 9일, 中은 9월 3일이 전승절인 이유

박영서 2023. 5. 12.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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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올해 전승절열병식 전쟁으로 축소
러 전승절은 독일 항복 받은 5월 9일
우크라 전승절도 러와 같았으나 변경
美, 日 항복받은 9월2일이 전승기념일
中과 대만의 전승절은 똑같이 9월3일

세계의 시선이 5월 9일 치러진 러시아 전승절(戰勝節)에 쏠렸다. 전승절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면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대부분이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나라별로 날짜는 조금씩 다르다. 국민 통합과 자부심의 상징으로 불리는 각국의 전승절을 알아본다.

◇쪼그라든 러 '대조국 전쟁' 열병식

지난 9일 러시아가 78번째 '대조국 전쟁' 승리 기념일을 맞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행사를 열었다. '메인 이벤트'는 열병식이었다. 열병식은 러시아 군악대의 2차 세계대전 군가 '성전'(聖戰) 연주와 당시 베를린 함락 선봉 부대인 이드리츠키 소총사단의 '승리의 깃발' 입장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전과 비교하면 현격히 초라한 수준이었다. 러시아는 매년 열리는 열병식에서 군사력을 과시해 왔었다. 최첨단 탱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붉은광장을 지나고, 전투기·폭격기·헬리콥터가 상공을 날아다녔다.

올해의 행사는 사뭇 달랐다. 병력 8000명이 참가해 2008년 이후 최소 규모를 기록했다. 단골손님이었던 제4근위전차사단, 제2근위차량화소총사단 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력 전차 행렬은 더 줄었다. 작년 열병식에선 T-72 10대, 신형 전차인 아르마타 3대와 T-90 7대가 위용을 뽐냈었다. 하지만 올해는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의 주력이었던 T-34 단 한 대뿐이었다. 다만 티그르 전술차량, 우랄 장갑차, 이스칸데르 미사일, S-400 방공미사일, 야르스 ICBM, 부메랑 장갑차 등은 등장했다.

보안 문제로 러시아 공군의 대규모 시범 비행도 없었다. 열병식을 포함해 전승절 행사가 1시간도 채 안 돼 끝난 것도 이례적이었다. 러시아 국민들이 전쟁에서 사망한 참전용사의 영정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불멸의 연대' 행진도 취소됐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탓에 군 장비와 병력을 대거 동원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러시아의 아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성대한 축하 행사를 여는 것을 국민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감안한 결정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날은 구소련이 독일 나치 정권에게서 항복을 받아낸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1945년 5월 7일, 독일군 알프레드 요들 작전참모장은 프랑스 동북부 랭스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모든 군사행동은 5월 8일 오후 11시(중부유럽 시간)부터 중단된다'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그런데 스탈린은 이 항복문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역할은 '붉은 군대'가 맡았다"면서 "나치의 심장이 베를린이기 때문에 항복 서명은 베를린의 소련군 사령부에서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국 8일 오후 10시 43분, 베를린 근교 독일공과대학에 설치된 소련군 사령부에서 항복서명식이 다시 열렸다. 이 때가 모스크바 시간으로 9일 0시 43분이었다. 서명이 끝나자 소련은 승전을 공식 선언했고, 스탈린은 승전 기념 특별연설을 했다. 이런 이유로 서유럽은 5월 8일을 '유럽의 전승기념일'(Victory in Europe Day)로 제정했고, 러시아는 5월 9일을 전승절로 기념한다.

우크라이나도 구소련의 영향을 받아 매년 5월 9일에 행사를 열어왔었다. 하지만 올해는 완전히 달라졌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승전기념일을 러시아가 아닌 유럽과 같은 5월 8일로 바꿨다. 대신 9일은 유럽연합(EU)과 함께 '유럽의 날'로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日 항복문서 서명일 기념하는 美·中

미국은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인 9월 2일을 '대일 전승 기념일'(Victory over Japan Day)로 정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灣)에 정박 중인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열렸다. 이 날은 연방 공휴일은 아니지만, 주(州) 휴일로 정한 주들도 있다.

중국과 대만은 다음날인 9월 3일을 전승절로 기념한다. 당시 장제스(蔣介石)는 일본이 항복문서에 공식 조인한 9월 2일의 다음 날을 자국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에서 진정으로 승리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9월 3일을 승전기념일로 택하고 사흘간 청천백일기를 게양했다.

이어 일주일 후인 9월 9일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에서 일본과 따로 항복 서명식을 가졌다. 이날 지나(支那)파견군 총참모장 고바야시 아사사부로는 국민정부 육군 총사령관 허잉친(何應欽)이 제시한 투항요구서에 서명했다.

뿐만 아니라 장제스는 일본이 중국에 수립했던 괴뢰정부에 참여한 한간(漢奸)의 명단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한간에 대한 정의까지도 명확하게 설명했다. '일본에 협조하거나 일본과 공모해 조국에 해를 끼친 민족 반역자'가 한간이었다. 명단이 제출되자 한간 사냥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스 물리친 튀르키예 '승리의 날'

튀르키예는 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2차 대전과 관련된 전승절은 없다. 하지만 튀르키예는 8월 30일 '승리의 날'을 기념한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된 그리스는 자신들을 약 400년 지배했던 튀르키예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던졌다.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지원을 받은 그리스는 1919년 5월 오스만 제국을 향해 진군했다. 1920년 8월이 되자 그리스는 앙카라 등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 대부분을 장악했다. 패전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이때 나라를 구한 영웅이 등장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다. 그는 튀르키예 국민군을 조직해 그리스군과 맞섰다. 둠루프나르(Dumluprnar) 전투는 이 전쟁의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전투였다. 튀르키예 서부 아피온카라히사르 주에 위치한 둠루프나르 마을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는 1922년 8월 26일부터 8월 30일까지 4일간 지속되었다.

병력과 화력에서 열세였지만 터키군은 혁신적인 전략을 동원했다. 기습 공격과 게릴라전을 감행해 그리스 방어선의 약점을 집중 공격했다. 20만 그리스군 총사령관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 중장이 포로로 잡히면서 전투는 튀르키예의 승리로 끝났다. 덤루피나르 전투의 승리는 그리스의 튀르키예 침공을 끝나면서 공화국 수립을 위한 길을 열었다. 이 전투는 튀르키예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여겨진다.

이날은 한국의 광복절과 비슷한 위상을 가진 국경일이다. 열병식을 비롯해 온갖 애국적인 축제들로 가득 찬다. 모든 거리는 인산인해다. 민족주의를 넘어 국수주의를 보는 날이기도 하다.

박영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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