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정부 1년, '분노한 여자'가 학교 빠지고 용산에 왔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윤석열 정부의 행보를 보면 제가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여성 인권 의식이 낮아지지 않을까 걱정이 돼요. 정치인의 발언이나 정책은 그 영향력이 세잖아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맞은 지난 10일 오전, 중학교 1학년생 김이름 씨(가명)는 학교가 아닌 용산 대통령집무실 앞으로 나와 섰다. 집무실 앞에서 각계 시민단체의 '윤 정부 1년'기자회견이 한창이던 이날, 이름 씨는 보라색 확성기를 들고 대통령실을 향해 함성을 질렀다. "윤석열 대통령은 분노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이름 씨는 세계 최대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서포터즈 회원이다. "대통령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에 젠더정의를 요구하겠다"는 이날의 집회 소식을 듣고 학교까지 빠지고 현장을 찾았다. 여성계의 쟁쟁한 활동가 및 정치인들이 자리를 채운 이날 현장엔 이름 씨를 제외하고도 7명의 청소년들이 학교 대신 용산에 왔다.
이름 씨는 <프레시안>과의 현장 인터뷰에서 "여성부는 (여성 인권 등에 대한) 공신력 있는 자료를 만들고, 연구 토대를 제공하고, 연구를 바탕으로 여성정책을 만드는 부처"라며 "부처가 폐지되거나 권한이 줄어들면 여성 인권이 많이 후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여가부 폐지 공약'이 나왔을 때부터 우려가 많았다"고 집회 참여의 배경을 밝혔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월 대선 후보 시절 본인의 SNS 한 줄 공약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예고했다. 윤 대통령은 당선 이후 정부 구성 당시부터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지키겠다"는 입장을 확실히 해왔다. 지난해 10월엔 '비속어 외교' 사태 속에서 여성가족부 폐지를 포함한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여가부 폐지안을 국면전환 카드로 활용하기도 했다.
여성가족부의 여성정책 수립·조정 등 업무를 삭제하고 대부분의 업무를 보건복지부 산하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로 이관하겠다는 것이 당시 정부의 여가부 폐지·개편안 골자였다. 윤 대통령은 해당 안에 대해 "여성부 폐지는 여성 보호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자평했지만, 앞으로의 여성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여성청소년 당사자 이름 씨는 분노했다.
"성평등이나 청소년 인권은 '복지'의 차원에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당연한 권리인데요. 인권 관련 업무를 보건복지부로 옮기겠다는 것 자체가 여성 인권의 수준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어요."
'여성가족부 존치'를 외치기 위해 현장을 찾았지만, 현 여가부 장관인 김현숙 장관에게도 할 말은 많았다. "모든 부처의 성평등 추진을 총괄"해야 할 부처의 장관이 누구보다 떨어지는 성평등 의식을 반복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김 장관은 지난해 7월의 인하대학교 성폭력·사망 사건(관련기사 ☞ 인하대 성폭력 사건은 "정말 '개인의 문제'인가?"), 9월의 신당역 스토킹 살해사건(관련기사 ☞ '여혐 범죄'가 아니라는 김현숙 장관…얼마나 더 죽어야 '혐오' 인정하나) 등 심각한 젠더폭력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해당 사건들이 "젠더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에 발맞춰 여가부의 각종 문서 및 보고 사안에서는 '젠더', '여성폭력', '성평등' 등의 단어가 일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수립 공청회에선 그간 사용돼온 '여성폭력'이란 단어가 단순한 '폭력'으로 대체됐고, 올 1월 발표된 여가부의 신년 업무추진계획서에선 '젠더', '성평등' 등의 단어가 아예 사라졌다. (관련기사 ☞ 여가부 신년 업무추진계획 살펴보니 '젠더', '성평등' 사라졌다)
이날 현장을 찾은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이를 두고 "(지난 1년간)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노골화했지만, 이것을 성차별이라고, 젠더 기반 폭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시됐다"라며 "그 중심에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있었다는 것은 크나큰 부끄러움"이라고 지적했다.
이름 씨 또한 "여성을 차별하는 발언을 직접 하지 않았어도, 만약 여성을 약하게 보거나 남성의 소유물이나 장난감처럼 보면서 하는 스토킹, 강간 같은 범죄라면 모두가 여성혐오, 여성폭력 범죄가 될 수 있지 않나요?" 되물으며 "여성가족부에서 성폭력 범죄 등을 두고 여성폭력 범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식견이 부족한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범죄 등 여성폭력의 문제는 이름 씨와 같은 여성청소년 당사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대표적인 '젠더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여성 청소년·어린이의 성폭력 피해상담 비율은 전체의 17.4%에 이른다. 디지털성범죄 내의 미성년자 피해자 비율은 여가부의 집계가 시작된 이후로 꾸준히 늘어 지난 2021년을 기준으로도 전년 대비 61.9%(여성가족부) 증가했다.
이름 씨는 "여성가족부는 여성정책 말고도 청소년 정책이나 성폭력 피해자 보호,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 같은 정책을 담당을 하는 곳"이라며 '대통령이 여성가족부의 권한을 줄이려 하고, 여성가족부 스스로도 여성을 지우려 하고 있는' 지금의 정부 행보가 결국 "여성 청소년 인권의 하락으로 이어질 것 같다"고 평했다. 예견된 '우리' 인권의 하락을 막는 것, 그가 이날 학교를 빠지고 용산에 선 이유다.
국제앰네스티의 이날 기자회견은 여성 청소년으로 자리에 선 이름 씨와 같이 각곅각층의 여성 당사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기 위해 마련된 행사였다.
연대발언을 위해 참여한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나영 대표는 "여성과 성평등을 삭제하고 인구와 가족만을 강조"하는 윤 정부의 정책 기조가 사회를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불평등한 조건을 전가하고, 돌봄의 책임은 가족에게 전가하고, 오직 노동 효율만을 뽑아내려는 사회"로 만들 것이라는 우려를 전했다.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 집행위원장은 여가부 산하 다문화가정지원센터 내의 선주민-이주민 임금차별 문제 등을 언급하며 성소수자,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포괄하지 않고 "양성평등적 관점에 머무러있는 여성가족부의 시야를 성평등으로 넓혀가기를 강력히 촉구"했다.
유호정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여성가족부 폐지, 무고죄 강화 등의 정책적 카드를 소위 '이대남' 공략 전략으로 활용해온 윤 정부의 태도를 지적하며 "피해 지원 현장에선 '여가부가 폐지되면 (피해) 지원을 못 받는 거냐'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지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상임활동가는 "윤 대통령은 '세계화'도 참 많이 부르짖으신다. 그런데 국제사회는 한국을 향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하고 다양성 존중 사회로 나아가라고 십수 년째 부르짖고 있다"라며 "혐오의 흐름에 편승하지 말고 시대의 흐름을 따르시라" 꼬집었다.
국제앰네스티는 이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여가부 폐지 시도 저지를 위한 글로벌 캠페인 론칭할 예정이다. 신민정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은 "9월 가을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까지 국제적 압력을 형성하여 더 이상 국회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시도로 상징되는 성평등을 저해하는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힘을 모으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유엔(UN)의 국제인권규약 당사국으로서 UN여성차별철폐협약 제3조가 규정하고 있는 "정치·사회·경제·문화 분야에서 여성의 발전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지난 1월 2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4차 국가별 인권상황 정기검토(UPR) 한국권고에선 미국·영국·캐나다 등 참가 국가들이 국내 여성가족부 폐지 이슈에 대한 우려의 뜻을 전한 바 있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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