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0. 과천 아해박물관
1989년 전 세계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제정한 ‘유엔아동권리협약’ 31조는 ‘놀이’를 아이들의 권리로 선언한다. ‘모든 어린이는 충분히 쉬고 놀면서 자신의 나이에 맞는 놀이와 예술, 문화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렇다. 놀이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직업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
■ 아름다운 숲에서 다 같이 놀자
아해박물관(관장 문미옥)은 한국 전통놀이의 역사와 문화를 두루 살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즐거운 놀이터이자 창조적 배움터이다. 안해가 아내로 바뀐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해’는 어린이의 옛말이다. 아해박물관은 옛날 아이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며 어떻게 놀았는지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박물관과 이어진 숲에서 옛날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도록 놀이판을 벌여준다.
과천시 주암동 아담한 동산에 안겨 있는 아해박물관에도 싱싱한 초록빛이 가득하다. 박물관에서는 현재 2023년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이 진행되고 있다. ‘자연과 함께 오래 오래 논다는 것’이라는 프로그램의 시간표에서도 전통놀이의 재미가 느껴진다.
1차시는 ‘도토리팽이, 나무에서 떨어져 팽그르 돌다’ 2차시는 ‘연, 바람에 기대어 날다’ 3차시는 ‘염색-풀, 나무, 흙으로 물들다’이다. 도토리팽이, 가오리연, 손수건 천연염색 체험키트를 제공하며 모든 프로그램은 무료로 진행되는데, 1~3차시까지 중복해서 신청할 수 있다. 단체로 신청하면 차량지원도 가능하다니 관심이 있으면 전화로 문의하면 되겠다. 박물관은 지난 3월부터 11월까지 ‘문화가 있는 날’ 프로그램 ‘우리 동네 전통 놀이터 -다 같이 놀자’를 박물관 옆 아해숲에서 진행하고 있는데, 게줄다리기는 5·7·9·11월 홀수 달에, 비석치기는 4·6·8·10월 짝수 달에 운영한다. 누구나 사전예약으로 신청할 수 있는데 선착순으로 마감한다.
조상들의 슬기를 엿보고 체험할 수 있는 전통 놀잇감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은 어떻게 설립됐을까. 서울여대 아동학과 교수인 아해박물관 설립자 문미옥 관장은 아동교육의 선진 이론을 배우기 위해 국제행사에 참여하면서 한국의 전통놀이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전통놀이가 아동교육에 매우 소중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의 아동학자들에게 자랑하고 내세울 만한 놀이감을 보여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그는 이때부터 열성적으로 전통 놀이감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88올림픽이 열린 1988년부터 수집한 전통 놀이감은 교수연구실을 채우고 집안에도 넘쳐났다.
전통놀이가 창의성과 과학성, 예술성을 기르는 높은 수준의 공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그는 부친이 물려준 대지에 어린이전통놀이체험박물관을 건립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놀이의 즐거움과 낭만을 돌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해박물관의 고민은 어른들의 무지와 욕심으로 아이들에게서 빼앗은 놀이의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에 집중돼 있다. 아이들이 재미있는 놀이를 통해 꿈을 찾고 가꾸는 놀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이런 노력으로 창의체험 프로그램 부분에서 전국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 놀이로 세대와 세대를 잇다
서광일 학예사의 안내로 1층 상설전시실을 둘러본다. ‘천인천자문’은 어떤 책일까? 한 권의 책에 담긴 정성이 놀랍다.
“아이가 돌을 맞을 때 선물한 책입니다. 아버지나 조부가 글을 아는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천자문의 1천 글자를 한 사람에게 한자 씩 1천 사람에게 받은 글씨를 모아서 만든 책이지요. 1년 365일 안에 책을 완성해야 하니 하루에 세 집을 돌아다녀야 했겠지요?”
자세히 보니 천자문 글자마다 오른편에 작은 글씨로 글씨를 쓴 사람의 자필 서명이 있다. 한글로 훈을 단 것도 책의 가치를 더해준다. 직사각형의 방패연이 여러 점 걸려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전선에 우리 군사들만 알아보도록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문양을 단 연을 날려 명령을 전달했던 사연을 들려준다. 놀이감으로만 알았던 연에도 이런 사연이 담겨 있다니 놀랍다. 연을 날릴 때 사용했던 여러 가지의 얼레도 여러 종류가 전시돼 있다.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방패연 옆에 모형 비행기와 우주선을 배치한 것도 재미있다.
손자손녀와 손잡고 박물관을 관람하는 중년이라면 팽이와 썰매를 전시한 곳에 서면 마음이 절로 즐거워진다. 손주에게 자신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며 팽이를 만드는 방법, 잘 돌리는 기술을 설명하다보면 세대 간의 소통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한겨울 꽁꽁 언 시냇가에 친구들과 어울려 썰매를 타고 팽이를 돌렸던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 지을 것이다. 전시된 팽이가 여러 종류다. 말팽이, 장구팽이, 숫자팽이, 허리들어간 줄팽이, 줄팽이, 88올림픽팽이도 있다. 사금파리팽이와 돌멩이팽이도 있으니 돌릴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놀았다. 명절이면 빠지지 않는 윷놀이도 빼놓을 수 없다.
흔히 보는 일반윷을 비롯해 엄청 커다란 큰윷과 장작윷, 자그마한 종지에 담아 노는 종지윷, 밤 윷, 콩 윷, 팥 윷까지 온갖 윷을 보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놀이를 즐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팽이만큼이나 썰매의 종류도 다양하다. 양반다리 썰매, 서서타는 썰매, 막대손잡이썰매, 외발썰매, 방향전환썰매, 스케이트 날썰매, 철판날썰매, 눈썰매를 타고 동심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산과 들에 자라는 칡넝쿨을 감아 만든 칡공으로도 축구를 할 수 있을까? 아해박물관 숲에도 칡이 많아 칡 줄기로 칡공, 칡굴렁쇠를 만들어 놀이에 활용하고 있다. 88올림픽 개막식 때 한국의 놀이를 상징하는 놀이로 세계에 소개된 굴렁쇠도 있다. 경기장을 가로지르며 달려갔던 굴렁쇠 소년을 떠올려 본다. 우주소년 아톰을 그린 아톰딱지, 새아씨 종이인형, 판박이 인형옷입히기, 여자아이들도 즐겨 놀았던 구슬치기, 여름날 더위까지 식혀주던 물총도 빛이 바랬지만 유년 시절로 안내하는 유물이다.
전시실 끝에 근대 놀이와 관련된 유물들 전시되어 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37년에 펴낸 잡지 ‘어린이’가 있다. ‘아이를 한울님 같이 생각하라’고 가르친 해월 최시형 선생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은 방정환은 정순철(해월의 외손자) 등과 색동회를 조직해 어린이날을 제정한다. 어린이를 존중하는 정신의 뿌리가 동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층은 산마루교실은 체험학습장이다. 통유리를 통해 동산의 나무들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아이들은 나무를 잘라 다듬어 팽이를 만들고 칡을 엮어 공을 만든다. 숲에는 상설전시실보다 더 큰 ‘한라백두 놀이마당’과 ‘콩쥐네 집’에도 선조들의 지혜와 땀이 밴 소중한 유물들이 가득하다.
■ 지켜내야 할 아해숲
즐거운 놀이가 벌어지는 ‘아해숲’은 아해박물관 전시실에서 관람한 내용이 펼쳐지는 아해체험숲이다. 아해숲에서 아이들은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먹고, 칡을 말아 공을 만들고 숲에서 주운 알밤으로 윷놀이를 벌인다. 아해숲은 사시사철 잔치가 벌어지는 흥겨운 놀이마당이다. 숲에 난 길을 따라 걸으며 대자연의 신비를 가슴에 품는다. 동무들과 소나무길, 밤나무길, 상수리길, 왕벚나무 꼬부랑길, 살금슬금 길을 걸으며 우람한 참나무와 작은 풀꽃을 만나는 시간도 즐겁다. 황토길, 낙엽길, 나무다리길, 굽은 길에서 만나는 곤충과 꿩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깨친다. 숲속 곳곳에 놓인 놀잇감 유물은 전통놀이를 벌이는 작은 마당이다.
그런데 머잖아 이 아름다운 숲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박물관 주변이 주택단지로 지정되면서 박물관 숲까지 개발지역에 포함되어 이 계획을 철회하도록 재판했으나 1차 패소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도시의 품격은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같은 문화시설이 말해준다. 숲이 사라지면 박물관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아해숲에 우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관계 당국의 결단을 촉구한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장
이정민 기자 jmpuhaha@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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